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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아, 야옹아 ~08

1차 창작 BL





참 좋은 곳이었다. 효경은 할머니집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625동란 때 불에 타 다시 지었다던 한옥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낡은 소나무의 냄새가 났고, 멀리에선 사시사철 이름 모를 새들이 우짖었다. 나무 냄새, 바람 냄새, 햇살 냄새, 그리고 저만치에서 피어나던 강물의 냄새. 마루에서 내려와 몇 걸음을 걸어 나가면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 넓고 푸른 낙동강 자락이 펼쳐져 있었다. 절벽을 비잉 둘러가며 쌓여있던 야트막한 돌담에 매달려 먼발치를 내려다보면 휘 돌아가는 강의 푸른 줄기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 형세가 꼭 용이 몸을 감고 있는 것과 같았다.*


때문일까. 닷새에 한 번씩 장이 서던 읍내에는 유난히 용과 관련된 이름이 많았다. 효경은 매일 장이 설 적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읍내로 나가 용궁수퍼에서 아이크림을 얻어먹고는 했다. 그땐 효경도 참 밝은 아이였다. 백여 가구가 드문드문 어깨를 맞대고 있던 작은 동네엔 오락실도, PC방도 없었지만 효경은 그래도 그곳을 참 좋아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효경은 하얀 얼굴을 뽀독뽀독 씻고선 동네를 구경하러 나섰다. 돌담에 매달려 저만치 흘러나가는 낙동강을 구경하거나 효경을 유난히 귀여워했던 이장님의 자전거 뒷자리에 매달려 동네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 예천의 작은 마을에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깊은 숲, 사시사철 다양한 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나무와 바람 소리, 설익은 밤나무 위를 잽싸게 노닐던 다람쥐. 큰 눈을 끔벅이던 뒷집의 누렁소와 효경만 보면 반갑게 꼬리를 흔들던 진돗개 꼬망이. 소가 밥 먹는 걸 구경하고, 꼬망이와 돌담을 따라 뛰어도 하루는 지루할 새 없이 바삐 저물었다. 비가 오는 날이 가장 지루했다. 그런 날은 하루가 참 길게만 느껴졌다.



‘할매, 이거 뭐야?’



장마철이었고, 벌써 이틀동안 밖엘 나가지 못해 효경은 잔뜩 뿔이 나 있었다. 할머니는 마루 끝에 앉아 콩을 다듬었고, 효경은 마루 위에 엎드려 누워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지만 이틀동안 집 안에만 갇혀 있으려니 좀이 쑤셔 참을 수가 없었다. 호랑이를 그리다 말다를 반복하다 효경은 벌렁 드러누웠고, 마루에 서있던 오래된 서랍장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그때에도 꼬리가 참 길어 여우를 닮았었던 갈색 눈이 호기심에 잔뜩 반짝거렸다.



‘사탕? 할매, 이거 사탕이지, 그치!’



효경이 까치발을 들며 서랍장에 매달렸다. 라벨지를 떼어내고 깨끗하게 씻어 말린 잼 병 안에 동그란 유리구슬 같은 것이 두 알 정도 들어 있었다. 그 사탕의 색이 얼마나 오묘했는지 효경은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났다. 꽃분홍 같기도 했고, 노란 나비의 날개색을 닮기도 했고, 숲의 싱그러운 잎새 같기도 했다. 예뻤다. 효경이 저도 모르게 군침을 다셨다. 


입 안에 쑥 넣고 혀끝으로 굴리면 얼마나 달콤할까. 


효경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유리병을 꺼냈다. 고사리 같은 손을 꼬물거려도 단단히 닫힌 입구는 잘 열리지 않았다. 다 열기도 전에 할머니가 효경의 손에서 유리병을 스윽 빼앗았다. 그리고는 효경의 손이 닿지 않을 가장 높은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효경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왜애, 사탕 먹고 싶어, 할매─ 칭얼거리던 제 손자를 향해 할머니는 부드럽게 웃었다.



‘저건 효경이 같은 아이가 먹으면 안 되는 거야. 할매가 다른 사탕줄게.’

‘왜애. 싫어어─ 할매, 나 이거 먹으면 안돼?’

‘이건 안돼. 다른 사탕도 많잖니. 다른 거 먹자, 응?’



할머니는 다정했지만 단호했다. 어린 효경은 점점 약이 올랐고, 서러움에 북받친 눈에서 결국 눈물이 뚝뚝 흘렀다. 할매 나빠, 나빠… 구슬프게 울던 손자를 쓰다듬으면서 할머니는 잠시 난감해했다. 천성이 밝아 말을 잘 듣다가도 저가 좋은 곳에선 꼭 묘하게 고집을 부리던 아이였다. 세월만큼 주름이 깊던 손이 따뜻하게 손자의 뺨을 매만졌다. 착하지, 뚝. 훌쩍거리던 효경이 스르륵 눈을 들어 올렸다. 코가 벌겠다. 효경을 달래주던 할머니의 목소리는 그때도 참 다정하고 따뜻했었다.



‘저건 사탕이 아니라 약이란다. 효경이 생각만큼 달지도 않고 맛있지도 않아.’

‘진짜? 약이면 막, 막 써? 엄청 써?’

‘그럼, 엄청 쓰지. 맛도 없구.’

‘배 아플 때 먹는 거야? 막, 효경이 배 아야 하면 먹어?’

‘아냐. 배 아플 때가 아니라 효경이가 엄청, 너무너무 아플 때 먹는 약이란다.’

‘효경이 아프면 할매가 걱정하는데…’



할매 걱정하면 싫은데… 긴 눈꼬리가 추욱 가라앉았다. 할머니가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귀여워서, 어쩌면 기특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약국에서 팔아? 효경은 물었다. 할머니는 픕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파는 게 아니란다. 그리고는 찬찬히 손자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면서 말했다.



‘선물 받은 거야.’

‘선물?’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 우물거리면서 할머니는 소리 없이 손자와 꼭 같은 긴 눈꼬리 끝을 접으며 아득히 웃었었다. 꿈에 빠진 소녀 같았다. 사춘기 소녀처럼 수줍게 웃으며 할머니는 말을 이었다. 정말로 아주 오래 전에.



‘할머니가 효경이보다 나이가 조금 더 있었을 때 말야. 그때 아주 귀한 분이 주고 가셨단다. 효경이도 없고, 효경이 아버지도 아직 없었던 그 먼 옛날에.’

‘귀한 분? 귀한 분이 뭐야?’

‘예쁜 사람. 눈이 꼭 햇님처럼 반짝였던, 아주 예쁜 남자였었지.’

‘햇님?’

‘그래, 햇님.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 예쁜 햇님.’



효경은 할머니의 이야기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햇님은 하늘에 있는데… 할머니가 연신 손자의 뺨을 귀여운 듯 쓰다듬었다. 그 푸근한 얼굴이, 그 따뜻한 미소가 효경은 마냥 좋았다. 그때는 모두 다 좋았었다.



‘그러니까 먹으면 안돼. 몸이 아주 아플 때만 먹는 거란다. 효경이 할아버지처럼.’

‘? 효경이 할부지 안 계신데… 아, 맞다. 할매 왜 효경이는 할부지 없어?’



그 말에 할머니는 웃었던가, 아니면 말을 흐렸었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효경이 좀 더 나이를 먹어서 철이 있었더라면 그런 얘기는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다. 효경의 아버지가 날 때부터 할아버지는 없었다. 집이 불타던 날에 임신 중이던 자신의 어린 처를 남겨놓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노라고, 그리하여 그 어린 처가 홀로 하나 뿐인 아들을 정성으로 키우며 고생을 참 많이 했노라며 어른들은 말했다. 지극정성으로 키웠던 아들의 또 하나뿐인 아들이던, 하나 뿐인 손자였던 할머니에게 소중한 보물이었다. 효경은 그 이야기를 너무 늦게 들었다. 그렇게 타일렀는데도 기어이 그 약을 집어먹은 자신이 앓아눕고 난 후에, 그렇게 밝았던 효경이 1년동안이나 웃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아이가 되어버렸던 후에. 할머니는 그때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죄송했다고 말씀 드리질 못 했는데. 


효경은 아직도 그 하나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더불어 아직도 가끔은 떠오르고는 했다. 할머니의 푸근했던 웃음과 다정했던 목소리, 낙동강 푸른 물길이 휘 돌아 나가던 예천의 작은 마을, 그리고 가장 높은 선반 위에 놓여 있었던 그 구슬처럼 예뻤던 ‘약’.




할머니는 그 약을 ‘숨’이라고 불렀다.















아침부터 공기가 눅눅했다. 이런 날은 어쩐지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하늘은 흐렸고, 해가 잘 보이지 않으니 날이 밝은 걸 알면서도 괜히 몸이 쳐진다. 그런 날이었다. 열어둔 창 너머에서 빗소리가 툭툭 떨어졌다. 효경이 뒤척이며 침대 안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비만 오면 어쩐지 공기가 무거웠다. 이 집이 산과 맞닿은 탓인지, 아니면 그냥 비가 와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목까지 끌어당긴 담요 속에서 마른 어깨가 확 오그라들었다.



“추워…”



비가 와서 그런가. 아직 다 뜨이지 않은 꿈결 속에서 효경은 생각했다. 이상하게 몸이 으슬으슬 찼다. 추우니까 자꾸만 몸은 더 깊은 쪽을 향해 파고 들었다. 


왠지 침대 안쪽이 따뜻했다.


뭐지. 온기를 따라 스르륵 손을 끌어내리면서 효경은 멍하니 우물거렸다. 그러다 이내 눈을 감은 채 흐 웃었다. 야옹이겠지.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날이 좀 서늘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침대 속에 파고들고는 했었다. 잠결에 뒤척거리다가 낯설고 뜨뜻한 털뭉치 때문에 놀란 적이 몇 번이었나.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한다. 눈을 뜨지도 않은 채로 효경은 가만히 온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쓰다듬어줄 생각이었다. 담요 속을 꿈질거리던 손에 이윽고 따뜻한 것이 걸렸다. 효경이 잠이 덜 깬 눈을 게슴츠레 열었다. 낯설어서 그랬다. 어.


왜 이렇게… 말랑말랑하지, 우리 야옹이.



“털갈이 하나…”



우물거리면서 효경은 제게 쥐어진 것을 가만히 주물렀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했다. 기분 좋아. 흐 웃음이 터졌다. 꿈처럼 게슴츠레 웃으면서 효경은 체온의 근원을 향해 좀 더 몸을 붙였다. 따뜻하니 자꾸 졸렸다. 그런데 이거 좀… 만지는 느낌이 어쩐지, 약간… 딱딱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눈이 번쩍 열렸다. 코앞에서 노란 눈이 곤란한 듯 찌그러져 있었다. 세상에. 효경이 입술을 짓씹었다. 또 까먹었다. 야옹이가 이제 더는 ‘야옹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 그러니까 바보야, 어! 이건 그런 게 아니고!”



얼굴이 시뻘겋게 익는 것과 동시에 후다닥 손을 놨다. 득달 같이 변명부터 늘어놓는데 호율은 아무 말이 없었다. 효경이 잠시 멈칫 했다. 잠이 덜 깼나? 반쯤 열린 노란 눈에는 표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효경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자고 있구나.

생각한 그때였다.



“자는 거면 됐… 으웁 —!?!!!”



곧바로 밀쳐내지 못했던 건 얼어붙은 탓이었다.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입술이 먹혔다. 뭐지. 효경은 숨을 급히 들이키면서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나. 3초 정도 생각을 더듬은 후에야 가출했던 현실감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 망할 고양이가, 나한테, 키스 같은 걸 하고 있는데?!



“잠, 읍, 너 뭐하는… 웁,!”



어물어물 벌어진 틈을 호율은 놓치지 않았다. 조각난 생각의 파편들이 좀처럼 잘 모이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고 버둥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버둥거리기 시작하자 입술부터 급하게 포개놓았던 호율이 효경의 손과 턱을 양손으로 잡아 눌렀다. 그 악력에 효경은 일순 소름이 확 끼쳤다. 이럴 때는 정말 기가 막히게 호랑이였다. 


나랑 키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대체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이 자식은?! 


게다가 잠에서 덜 깬 건 효경도 마찬가지였다. 걷어차면 그만일 텐데 어쩐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공기는 무거웠고, 태세를 갖출 타이밍은 진작 빼앗겼다. 맞붙은 입술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버둥거릴수록 집요하게 부딪치던 입술은 효경이 입을 연 틈을 잽싸게 비집었다. 뭔가 뜨겁고 미끈한 촉각이 휘어 감겼을 때 효경은 그야말로 우뚝 굳었다. 반쯤 감겨있던 노란 눈은 암만 봐도 잠이 덜 깼다. 맛이 갔어. 생각을 삼키던 순간에도 혀끝은 거침없이 입 속을 헤집었다. 턱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게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너 진짜, 하지 말라고 그랬… 읍,”



잠시 떨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무섭게 입술이 엉켰다. 호율은 멈추지 않았다, 기보다 멈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인 것 같았다. 겹치며, 얽으며, 손목으로 옮겨간 양 손에 힘을 실으면서 호율은 효경의 허리를 타고 올라앉았다. 코끝에서 쏟아지는 숨결이 거칠었다. 잠깐 입술을 떼어내며 호율이 헉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못 참겠어. 호율이 제 입술을 짧게 핥고는 효경에게 입술을 거푸 겹쳤다. 효경이 괴로운 듯 눈을 좁혔다. 이제는 이 키스가 괴로웠다. 


제발, 그만, 부탁이니까, 그만.


키스를 멈춘 것은 어이없게도 효경의 핸드폰이었다. 문자를 알리는 수신음이 짧게 찌르륵 울리다, 스르륵 사라졌다. 그제야 호율이 입술을 떼어냈다. 효경의 하얀 귀가 불길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이 죽일 놈의 고양이가.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이 미친 고양이야!”



하얀 손이 허공을 가르며 퍼억, 등짝을 쳤다. 호율이 노란 눈을 왈칵 좁혔다. 아, 아프다니까요! 호율이 그랬던 것처럼 효경도 멈추지 않았다. 불끈 쥔 주먹과 발 끝이 무차별적으로 호율을 퍽퍽 두드렸다. 



"죽일 새끼야, 망할 새끼야, 씨발, 너 이딴 거 누구한테 배웠어, 어!"

"아, 너 손 진짜 맵다니까요, 아퍼, 아프다니깐!"



호율이 침대 위로 벌렁 누우며 엄살을 부렸다.  그래도 노란 눈은 웃고 있었다. 효경이 마지막으로 호율의 목덜미를 짤짤 흔들었다. 어오, 이 매저 같은 고양이 새끼.



“맞는 데 취미 있어? 어? 아주 죽여줄까?!”

“설마요. 내가 맞아주는 거지.”

“이게 이러고도 입만 살았지. 확 그냥…”

“그만, 응? 나 진짜 아파요.”



노란 눈이 아양을 부리듯이 옅게 일그러졌다. 입술까지 비죽거리면서 호율이 엄살을 피웠다. 효경이 냅다 호율을 걷어차려다, 말았다. 저 눈만 보면 화를 못 내겠다. 대체 그놈의 키운 정이 뭔지. 말을 삼키고 있으려니 호율이 슥 눈치를 봤다. 그래놓고는 이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근데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건데요? 화내면 오래 못 살아요. 인간은 수명도 짧다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화를 왜 내냐니. 몰라서 물어!? 꽥 소리를 쳤더니 호율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정말로 모른다는 듯이.



“아, 이것도 혹시 손가락 무는 장난처럼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미안해요. 안할게요. 진짜로 몰랐어요.”

“……”

“근데… 그냥 하고 싶어서.”



노란 눈이 천천히 끔벅였다. 효경이 잠시 눈을 좁히다, 이내 말았다. 더 화를 낼 기력이 없어진 탓이었다. 잊고 있었다. 너는 지난 석 달간 고양이였지. 짝짓기 소리는 잘만 하던데, 구체적으로 짝짓기라는 게 뭔지 알기는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절대 모른다는 쪽에 효경은 돈이라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핸드폰을 걸던가.

아, 그러고 보니 내 핸드폰.



“알겠고, 다시는 하지마. 알았어?”



침대를 내려가면서도 효경은 호율에게 거듭 강조했다. 호율이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하여튼 대답은 잘 해. 눈을 슥 흘겨놓고 효경은 식탁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효경이 쌓여있던 메시지를 확인하는동안 호율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무심히 주욱 핸드폰 스크롤을 당기며 메시지를 열어보던 효경이 일순 옅게 웃었다. 긴 눈꼬리를 휘어뜨리면서 액정을 향해 웃고 있던 얼굴을 호율은 가만히 쳐다봤다. 누구의 메시지인지는 안 봐도 훤했다. 같은 메시지를 읽고 또 읽는 얼굴을 보다 호율은 홱 눈을 돌렸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비가 오는 탓이라고 호율은 생각했다.









* * *



한남동 펜트하우스의 커다란 창에 물기가 부옇게 어렸다. 이른 비가 쏟아지던 아침이었다.



― 사망한 오정웅 의원은 지난 17대 국회의원 선거구 은평 갑에 출마, 고배를 마셨으나 당선자인 M당 조준표 의원의 비리를 고발… 보궐 선거 당시 압도적 표차를 기록하며 당선 됐습니다. K고와 K대 경영과를 거쳤으며 한때 운동권 출신으로…



하얀 대리석이 멀끔하게 깔린 너른 거실에서 TV만이 홀로 건조하게 떠들었다. 단조로운 외벽처럼 거실에 놓여 있는 가구라고는 80인치는 족히 넘어 보이는 커다란 TV와 자잘한 장식장, 소파가 전부였다. 소파에 앉아 팔걸이에 기댄 채로 은호는 잠자코 화면을 쳐다보았다. 화면 속에서 은호에게도 낯이 익은 사내가 당의 붉은 띠를 두르고 시장에서 상인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곧이어 남자의 장례식장 풍경이 이어졌다. 검은 한복 차림의 중년 여인이 오열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부엌 쪽에서 커피포트가 치익 울었다. 조리대 쪽에 서 있던 정민이 불쑥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도련님, 계란은 어느 정도로 익혀드릴까요?”

― 현재 빈소에는 각계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으며, H당에서는 빠르면 이달 내로 새 당대표를 선출할 예정이라고 대변인은 밝혔습니다. 한편, 오의원의 사망원인이 심장마비로 밝혀지며 병원마다 검진 문의 전화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됐어요.”

“그래도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심장질환은 정기적인 검사와 식생활을 고치는 것으로 예방할 수 있으며, 보건복지부에서는 국민건강증진을 위해…

“입맛이 없어서요.”



재미없다. 은호가 리모컨을 들고 TV를 껐다. 환자에게 청진기를 들이대던 의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쪽에 던졌던 책을 다시 펼칠 때 정민이 커피 한 잔을 받쳐 들고 거실로 나왔다. 은호가 정민이 내밀어준 커피잔을 잠자코 받아 들었다. 커피는 오늘도 취향대로 진했다. 한 모금을 천천히 들이킬 때 정민이 은호에게 물었다. 어쩐지 퍽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도련님, 어제 일 말입니다.”



잔을 떼어내던 손이 잠시 멈칫 했다. 정민이 고요히 웃었다.



“그 친구분 말인데요.”

“……”

“그대로 보내셔도 괜찮은 건지 해서요.”

“…아마.”



누구를 말하는 지는 분명했다. 알면서도 은호는 대답을 흐렸다. 지효경 얘기다. 은호가 잠자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어제의 단내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 손으로 그 달고 하얀 살결을 매만졌었다. 전부 생생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조르듯이 달라붙던 얇은 피부와 혈관을 태울 듯이 달아오르던 열, 온 사방에 요동을 치며 흩어지던 단내. 그 몸에 닿을 때마다 단내는 숨을 쉴 수 없을만큼 짙어졌다. 처음에는 일부러 그랬다. 확인을 위해서였다. 


그 다음부터는 도무지 통제를 할 수 없었다. 벗어날 수 없는 인력에 붙들려 버린 것처럼.


그것만으로도 심증은 충분했다. 지효경은 ‘단내’가 난다. 보통 인간들은 그 체취를 맡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은호는 그 체취에 까딱 이성을 잃을 뻔 했었다. 그 체취는 아무에게나 반응하지 않는다. 그 체취는, 그러니까 그 달큰한 냄새는…

어쩌면 정말 너일지도 모르지. 은호가 펼친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는 안 된다.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요.”



정민이 잠자코 은호를 내려다봤다. 은호가 소리 없이 엄지 끝을 질근거렸다. 아직은 증거가 부족하다. 자칫하면 지금껏 준비해온 모든 일들을 그르칠 수 있다. 그건 곤란하다. 호흡을 참고 그림자처럼 숨어 지낸 것이 몇 년인데,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찾아다녔었는데.


너를, 효경아.


생각을 삼키며 은호는 꾹 입을 다물었다. 준수한 눈썹 사이가 깊게 패이는 모습을 정민은 이번에도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정민은 결코 먼저 나서지 않는다. 동시에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남자였다. 모든 것은 필요와 목적에 의해 말해져야 한다. 바둑과 같았다. 적당한 자리에 돌을 놓아야 판을 잡는다. 정민은 결코 한 수를 쉽게 두지 않았다. 은호는 그 점을 이미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정민은 확실한 답이 아니라면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남자였다.

긴 침묵이 이어진 후에야 정민이 운을 뗐다. 도련님. 색이 깊은 까만 눈이 정민을 조용히 돌아보았다. 안경 속에서 눈 끝이 살짝 처진 진갈색 눈이 사람 좋게 웃었다.



“때마침 좋은 소식이 들어와 있었는데… 이 이야기가 도련님께 꽤 도움이 될 수 있겠군요. 올 초에 저희가 사회환원사업의 일환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는 입찰 공고를 냈던 걸 기억하시지요. 주제는 한국 호랑이였구요.”

“예, 기억합니다.”

“그때 입찰을 받아간 프로덕션이 요즘 한참 취재를 하면서 스토리보드를 작업 중이라고 홍보팀 쪽으로 보고를 올렸는데 말입니다.”



은호가 잠시 눈 끝을 구겼다. 이미 들은 이야기를 또 듣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스토리보드라면 이미 봤습니다.”

“예, 그대로 통과시키라고 컨펌까지 내려주셨지요. 그런데 그쪽 팀에서 첨부해준 자료를 다시 읽다보니… 재미있는 얘기가 있더군요.”

“……”

“한국 전쟁 중에 한국 호랑이를… 범을 만났다는 여인이 있어요.”



까만 눈이 잠시 흠칫 했다. 은호가 재차 물었다. 무슨 얘깁니까. 정민은 그 이야기에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콘솔에 놓여있던 커피가 천천히 식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잔을 응시하면서 정민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은호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저희는 이 한반도땅에서 이제는 멸종해버린 ‘범’의 흔적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제작하기로 했었죠. 저희 K컴퍼니의 상징이 호랑이니까요. 기업 이미지를 개선하고 홍보하는 효과가 클 거라고 당시에 제가 도련님을 설득해서 이 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물론 도련님께서는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으셨겠지만. 처음 입찰을 할 때 이런 조항이 붙어 있었어요. 영상의 분량은 총 1시간으로 하며, 신뢰 있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위해 세밀히 취재한 실제 목격담을 토대로 제작한다…”

“……”

“이번에 수정된 스토리보드에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있더군요. 한 어르신이 6.25 동란 중에 남편이 병을 얻어 삼이라도 캐본다고 산에 올랐다 범을 만났는데, 그 범이 약을 주었다고. 그리고 그 약을 먹은 남편이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고.”

“……”

“허나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손자의 이야기입니다.”



은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까만 눈은 정민을 향해 굳은 듯이 박혀 있었다. 은호가 겨우 신음처럼 말했다. 손자라니. 정민이 그린 듯이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웃음이 사라졌다.



“그 범이 할머니에게 약을 하나만 준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손자가 할머니의 ‘사탕’인지 무엇인지를 먹고 열병이 났는데, 그 어르신은 그 ‘사탕’이 범에게 받은 약이었다고 하더군요. 꼬박 열흘을 앓았다고 합니다만…”

“…거기가 어딥니까.”



검은 눈이 크게 흔들렸다. 지진처럼 일렁이며, 은호는 잠자코 팔걸이를 꽈악 움켜쥐었다. 숨을 가다듬으면서 은호는 거듭 물었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사라진 웃음처럼 정민은 곧장 답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웃지는 않았다.



“예천입니다.”



갈피를 잃었던 ‘운명’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 * *


탁자 위에서 벨이 울렸다. 침대 위에 푹 엎어져 있던 황금색 눈이 훌쩍 그쪽을 쳐다보았다. 지효경 핸드폰이다. 확인한 순간 호율은 잠깐 닫혀 있던 욕실 쪽을 흘깃거렸다. 쏴 쏟아지던 물소리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지효경 씻고 있는데.



“지효경, 전화 왔어요!”



풀썩 침대에서 내려서면서 호율은 효경을 불렀다. 듣지 못 했는지 효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여전히 신명나게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쳐다보면서 호율은 잠깐 고민했다. 문 열고 던져줄까? 호율이 붕붕 고개를 털었다. 아니, 지효경 자기 물건 함부로 대하는 거 짱 싫어하는데. 어차피 문도 잠겨 있을 것이다. 전화벨은 끈질기게도 이어졌다. 끊어졌다, 또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벨 소리가 호율은 슬슬 짜증이 났다. 아, 누구기에 그래, 대체.

생각하면서 핸드폰을 슥 들어올린 순간, 호율의 눈이 둥그렇게 열렸다. 어? 그리고는 다시 눈을 좁혔다. 액정에 끔벅거리던 이름을 읽은 것과 동시에 호율은 액정의 통화 버튼 위에 엄지를 밀었다. 낯익은 이름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지겹도록 익숙한 이름이었다.

해이찬.



“여보세요.”



핸드폰 너머가 조용했다. 뭐지. 호율이 잠깐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내고 상태를 확인했다. 이렇게 전화 받는 거 아닌가? 액정에 큼직하게 떠 있던 <통화중>이라는 말을 확인한 후에야 호율은 안심하고 다시 액정에 귀를 붙였다. 저기요, 여보세요. 거푸 물은 말에 그제야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저… 지효경 핸드폰 아닌가요.]

“아, 맞는데요.”

[……]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기요―”



맞다고 했는데도 ‘해이찬’은 답이 없었다. 아, 그러고보니 드라마에서 그랬다. 방해전파 같은 게 걸리면 전화가 끊어지기도 한다고. 끊겼나? 생각할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와는 톤이 달랐다. 좀 더 낮고 건조했다. 그리고 어쩐지 호율은 그 목소리가 거슬렸다.



[지효경 지금 집에 있을 시간인데.]

“아, 맞아요. 씻고 있거든요.”

[……]

“저기, 여보세요.”

[…넌 뭐야.]



대뜸 반말이었다. 호율의 미간이 일순 좁아졌다. 기분이 나빴다. 아니, 그보다는 본능적인 불쾌감에 가까웠다. 픽 웃으며 호율은 가볍게 받아쳤다. 그래도 목소리는 그닥 밝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기분이 더러웠으니까.



“넌 뭐냐뇨. 그러는 너는 뭔데 반말이세요.”

[됐고, 너는 뭔데 지효경 전화를 받고 자빠져 있냐고.]

“나? 같이 사는 사람.”

[……]

“그러는 너는 뭔데요. 지효경이랑 뭔데.”

[어, 너는 알 거 없는 사이.]



와, 해이찬이 이런 새끼였구나. 호율이 소리 없이 픽 웃었다. 아, 나 이 사람 진짜 싫어. 하지만 다음 말을 받아칠 사이도 없이 등 뒤에서 벌컥 문이 열렸다. 딴에는 급하게 나오긴 한 모양이었다. 수건을 대충 둘둘 싸맨 머리에선 물기가 뚝뚝 흘러 떨어졌다. 하지만 물기를 훔치는 것보다 호율의 손에서 핸드폰을 채가는 속도가 몇 갑절은 더 빨랐을 것이다.



“바보야, 누가 남의 전화 함부로 받으래, 어!?”

“? 불렀는데 안 나왔잖아요.”

“하여튼 이게 입만 살았… 이따 혼날 줄 알아.”



성질대로 꽥 높아지던 데시벨이 액정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줄어들었다. 여보세요, 하면서 돌아서는 등을 보며 호율은 인중을 당겼다. 얼굴 봐라. 입 찢어지겠네. 입으로는 여전히 짜증을 내고 있으면서도 얼굴은 못 숨긴다. 그 얼굴이 호율은 어쩐지 썩 맘에 들지 않았다. 맘에 안 들었다. 해이찬의 반말부터 지효경의 웃는 얼굴까지 전부. 그 마음을 알 턱 없는 효경이 전화기 너머에 울컥 짜증을 냈다. 왜 갑자기 전화야, 아침부터. 여기까진 평범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사가 해이찬답지 않았다.



[방금 그거 누구야.]



효경이 잠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화를 내고 있어, 이 인간은. 생각하니 받아치는 효경의 목소리도 딱히 밝지만은 않았다. 뭐가?



“뭘 또 뜬금없이 누구래. 너도 주은호 닮아가냐? 주어 어디 갔…”

[너 대신 전화 받은 거 누구냐고.]

“누구냐니, 그거야 당연히…”



호랑이? 아니면… 야옹이?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 턱이 없잖아. 생각하며 효경이 슥 호율을 돌아봤다. 호율이 답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요, 라고 묻는 듯한 얼굴을 효경은 한참 쳐다봤다. 어쩌지. 갈색 동공이 서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진짜, 어쩌지.



“그게, 어… 그러니까, 어! … 사촌동생.”



해이찬이 되물었다. 뭐? 효경이 입술을 잠깐 질끈 물었다 놨다. 사촌동생, 그러니까 사촌동생! 몇 번이고 강조하는 말의 속도가 순식간에 빨라졌다. 숨쉴 틈도 없었다. 마치 랩 같았다.



“그때 있잖아. 바보야, 나, 그 작은 아빠네! 어! 그래! 저기! 어! 유학을 갔는데! 얘가 이번에 한국에 들어왔거든! 어휴, 갈 데가 없다고 그러지 뭐야? 하하, 그러니까 어쩌겠어! 나랑 같이 지내야지. 아니, 나 말고는 서울에 친척도 하나 없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하여튼 사촌동생! 저 자식이 괜히 형 전화는 왜 받아서, 하하… 웃긴다, 그치?”



지켜보던 호율이 쯧쯧 혀를 찼다. 거짓말 진짜 못한다.



“근데 하필 해이찬이 이런 시간에 전화를 다 했네? 타이밍 웃긴다. 아니, 왜 하필 씻을 때 딱 전화해서…”

[이름 뭔데.]

“? 호율이. … 아니, 잠깐. 웃긴다? 야, 내가 왜 내 사촌동생 이름까지 너한테 알려줘야 되는데? 신상 털게? 무슨 바람 피다 걸린 것도 아니고, 내가…”

[성씨는.]

“어? 야, 당연히 지효율이지. 내 사촌인데 그럼 해씨거나 주씨겠냐? 아니, 왜 그런 당연한 걸 묻…”

[너희 아버지 외아들이라면서.]



순간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딸꾹질을 할 뻔 했다. 엄마, 이 새끼가 젓가락을 꽂았나봐요.



“어, 아… 어,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어떻게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

[삼촌 계신다고 왜 말을 안 해.]



어? 부르르 떨리던 갈색 눈이 일순 번쩍 열렸다. 속았어? 속은 거야?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있으려니 핸드폰 너머에서 이찬이 낄낄 웃었다. 난 또 뭐라고. 웃으며, 이찬이 효경을 불렀다. 애기야. 그 목소리에 효경은 하마터면 눈물이 찔끔 날 뻔 했다. 반가워서.



“애기는 얼어죽을… 아, 깜짝 놀랐잖아.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목소리는 왜 좍 깔고 지랄이야, 사람 쫄게!”

[우리 애기가 자기 놔두고 바람났나 했지. 하, 효경아… 놀랐잖아. 죽을뻔 해쏘.]

“어. 죽어, 미친 놈아. 어디서 애교야!?”

[또, 또 이러지. 야, 아무리 사촌이라 그래도 남자 막 들이고 그러면 안 된다? 큰일 나요, 우리 효경이.]

“이게 미쳤… 그런 소리는 니 잘난 여자친구한테나 가서 하시구요.”

[아, 나 헤어졌어.]



불퉁거리던 말이 우뚝 멈췄다. 잠깐. 내가 지금 좀 엄청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방금 그 말이 뭐였나 잠시 생각해보다 효경은 반 박자 늦게 반응을 했다. 뭐!? 저도 모르게 말꼬리까지 홱 올린 말에 이찬이 프 웃었다. 그 웃음결이 어쩐지 썼다.



[헤어졌다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냥 안 사귀기로 했다. 별로 안 맞더라고.]

“언젠 예뻐 죽겠다더니.”

[예쁘면 다냐. 연애는 좀 밀고 당기는 재미도 있어야지.]



이쁘면 다잖아, 너는. 그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걸 효경은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핸드폰이라서 다행이다. 얼굴을 보고 있었으면 다 들켰을 테니까. 지금 내 얼굴은 어떨까. 핸드폰을 움켜쥔 채로 효경이 슥 눈을 들었다. 그때 딱 호율과 눈이 마주쳤다. 냉장고를 열고 물을 마시다 호율이 소리 없이 효경을 돌아보았다. 그때만큼은 호율에게도 묻고 싶었다. 지금 내 얼굴이 어때, 야옹아.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효경이 스르륵 다시 눈길을 떨어뜨렸다. 나 진짜 못된 것 같아. 근데.


어쩌지. 너무 기뻤다.



“뭐… 안 맞았나보네.”

[그런 거지. 그러니까 우리 효경이, 오랜만에 오빠랑 술 한 잔 해야지?]

“뭘 또 술이야.”

[실연엔 원래 취하는 게 최고거든.]

“그냥 술을 마시고 싶은 거겠지, 핑계는.”



이찬이 낄낄 웃었다. 어떻게 알았냐? 그래놓고는 또 한참동안 효경에게 장난을 쳤다. 우리 애기는 오빠를 이렇게 잘 알아서 큰일이다, 결혼하자. 농담인 걸 빤히 알면서도 귀가 뜨거워서 효경은 부러 꽥 소리를 질렀다. 진짜 죽어라, 어? 이찬은 익숙한 듯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럼 언제 만날래? 묻는 말에 효경은 다시 눈길을 돌렸다. 빈 생수병을 우기고 있던 호율을 바라보며 효경은 대답했다. 저녁.



[왜, 일 있어?]

"아, 어. 북촌 가봐야해서. 아, 저게.. 그러니까 내 사촌동생이 가고 싶다잖아. 한옥! 그래, 한옥집 보고 싶다고! 하여튼 외국물 먹은 티는 엄청 낸다니까."

[.....]

"뭐야, 해이찬. 듣고 있어?"

[어어. 그럼 저녁에 보자. 신촌에서.]



맥도날드 앞. 이찬이 덧붙였다. 효경이 7시에 보자면서 시간을 구체적으로 정했다. 그럼 쉬라는 말을 하며 통화를 마무리하려고 할 때 이찬이 한 마디를 툭 덧붙였다. 근데.



[너 정말… 남자 애인 들인 건 아니지?]

“아, 이게 진짜. 야!”



왜 나는 이딴 걸 좋아해서, 왜 하필 이걸 좋아해서. 생각을 거듭 삼키면서 효경은 냅다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래도 어쩐지 자꾸만 부슬부슬 웃음이 났다. 호율이 효경의 얼굴을 한참 말없이 쳐다봤다. 끝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 자꾸 이렇게 웃음이 나는 건지, 왜 자꾸 저 웃음에 속이 상하는 건지.

비 때문이야. 호율도 효경도 그렇게 생각했다. 창문에 여름비가 말갛게 어려 있었다. 아침이었다.



















* * *


기와집을 에워싼 담장 위로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아침부터 날씨가 궂었던 탓인지 북촌은 다른 때에 비해 제법 한산했다. 차도르를 휘감은 여자 관광객들, 관광업체의 뱃지를 가슴마다 달고 있던 중국인 관광객들이 우산을 나눠 쓰곤 좁은 골목 사이로 멀어졌다. 담장의 처마 밑에 선 채로 이찬이 그제야 통화가 끝난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처마 끝을 타고 미끄러진 빗방울이 이찬의 운동화 끝으로 툭툭 떨어졌다. 잠깐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구경하다 이찬은 픽 웃었다.



“사촌동생이래요.”



곁에 서 있던 남자가 이찬을 스르륵 돌아봤다. 비를 삼킨 듯 옅은 물색의 도포에 운동화를 받쳐 신고도 남자는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가볍게 묶어 틀어 올린 황금빛 머리칼과 꼭 같은 색의 눈동자가 잠깐 의아한 얼굴을 했다.



“누가 그러더냐. 효경이가 그리 말하더냐.”

“그럼 또 누가 있겠어요. 뭐, 지효경 이러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

“하여튼 거짓말은 진짜 못하지.”



남자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의외였던 모양이다. 나는 하나도 안 이상한데. 하긴, 나만큼 널 아는 사람이 또 있겠냐. 생각에 이찬이 씩 입매를 밀어 올렸다. 그건 왠지 기분이 좋았다.



“지효경 거짓말 할 때 딱 특징이 있어요. 말이 엄청 많아지고 빨라지거든. 완전 랩이라니까요? 괜히 지가 성질을 뻑뻑 내면서 한 마디도 못 끼어들게 지 할말만 다 끝나면 성질을 뻑 내요. 그럼 뭐해, 얼굴엔 다 티나는데.”

“그건 그 아이 마음이 순수해서 그런 것이다.”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러고 있지. 지효경은 변한 게 하나도 없다니까.”

“……”

“아, 나는 진짜… 왜 이렇게 아는 게 많아. 쓸데없이.”



몰랐으면 좋았을텐데. 둥그런 눈 끝이 쓰게 웃었다. 알고 지낸지 2년이 고작인 단순한 동아리 동기 사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아마 짐작도 못하겠지. 그런 것들로 너를 알았던 게 아니라고, 나는. 나는 아주 오랫동안 너를 알았다. 아니, ‘느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찬은 어쩐지 아득해졌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래도 됐다. 10년이라니.

또 감성 팔이한다, 해이찬. 혼잣말을 흩어놓으면서 이찬은 스스로 얼굴을 붕붕 흔들었다. 남자가 이찬을 잠자코 돌아봤다.



“아, 꿀꿀한 얘기는 됐고.”



이찬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남자는 어떤 것도 이러라거나 혹은 저러라는 첨언을 하지 않았다. 그조차도 처마를 타고 떨어지는 비와 같았다. 돌아가면 돌아가는대로, 흐르면 흐르는대로. 남자가 강물처럼 아득히 웃었다. 속도 좋으시네. 이찬이 말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진위를 알 수 없는 말을 툭 흘려놓고 이찬은 픽 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지효경 사촌 이름이 뭐라는 줄 알아요?”

“뭐라더냐.”

“지호율.”

“……”

“아니, 호율이겠죠.”



남자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지워졌다. 웃음기를 잃은 얼굴을 흘긋거리고, 이찬은 무심히 거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닫혀 있던 맞은편 기와집의 문이 훌쩍 열렸다. 직원인 듯 보이는 여성이 문을 고정시키면서 대문 앞을 정돈했다. 대문에 懷杣이라는 현판이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회산. 소리 없이 말을 삼키면서 이찬은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이찬도 웃지 않았다.



“언제까지 숨어 다닐 건데요.”

“……”

“아들이잖아.”



남자는, 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 아들과 꼭 닮은 황금색 눈동자가 고요히 웃었다. 태양처럼.








(9편에서)







경북 예천의 회룡포 근처에는 실제로 이름에 용(龍)이 들어가는 가게들이 많습니다. 용왕수퍼, 용궁마트, 용궁식당, 용궁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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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열심히 머리 풀고 달리고 있는데 읽어주는 분들이 계신다니 넘 신나고 기뻐요ㅠㅠ 9편도 열심히 쓰겠습니다ㅜㅜㅜㅜㅜ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글을 씁니다. | 트위터 @ruka_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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