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야옹아, 야옹아 ~07

1차 창작 BL

「왼쪽 눈으로 태양을 만들고, 오른쪽 눈으로 달을 만들고—」


너른 굴 안에 어린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천지는 평화로웠다. 물을 통과한 햇살이 너른 터와 어린 침엽수들의 숲을 감싸며 쏟아졌다. 숲 속의 바위 옆에서 작은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꼭 둘이었다.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앉아 있던 범, 정신없이 나비를 좇고 있던 또 다른 범. 이제 갓 생겨나기 시작한 줄무늬는 옅고 흐렸다. 때문에 얼핏 보면 범보다는 작은 고양이가 떠오르는 생김이었다. 어른이 되기 위해 더 많은 계절을 보내야할 두 범은 아직 새끼였다. 앉아 있던 범이 나비를 좇고 있던 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비를 향해 팔짝 뛰어오른 작은 범은 이내 바닥에 푹 코를 박았다. 작은 범은 그래도 울지 않았다. 잽싸게 고개를 들고는 저보다 조금 더 큰 범 쪽을 돌아보았다. 나비가 다시 파르르 날개를 떨며 작은 범의 주변을 맴돌았다. 작은 범이 또다시 분주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좀 더 커다란 범은 줄곧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백두산 아래에서 오래도록 전해지고 있던 창세의 노래였을 것이다.


「호랑이 수염은 빛을 만들고, 호랑이 수염은 별을 만들고—」

「형님, 형님! 여기 보세요, 여기—!」


작은 범이 큰 범을 불렀다. 큰 범이 가만히 작은 범을 바라보았다. 옥빛 눈동자가 소리 없이 아우의 움직임을 좇았다. 아우는 신이 난 듯 했다. 나비를 향해 연방 앞발을 놀리면서 작은 범은 신이 난 듯 고르르 울었다. 작은 몸을 휘어 감싼 털처럼 밝은 눈동자가 찬란히 반짝거렸다. 마치 해를 닮은 듯한 황금색 눈동자였다.

아직은 새끼인, 허나 제 아우보다는 좀 더 자란 형이 잠잠히 이름을 불렀다. 호율아. 아우가, 호율이 발을 멈추곤 형을 돌아보았다. 그 틈에 나비는 저만치로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호율이 아쉬운 듯 수염을 찡긋 거렸다. 아씨, 거의 다 잡을 수 있었는데. 형이 물었다. 그리 좋으냐. 호율이 작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대답했다. 네, 엄청! 그리고는 사뿐사뿐 제 형의 곁으로 다가왔다. 형의 옥빛 눈을 올려다보는 아우의 눈이 또 한 번 빛인 듯 반짝거렸다. 잔뜩 들뜬 얼굴이었다.


「형님이 돌아오셔서 정말 좋아요. 이번엔 오래 계셨으면 좋겠다. 천지 바깥은 어때요? 재미있나요?」

「글쎄.」

「인간들은 어찌 사나요? 아, 궁금한 게 너무 많은데… 정말로 네 발 달린 쇠붙이를 타고 다니나요? 도력을 쓰지 않아도 천 리 바깥에 있는 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리고 또… 그래요, 세상 모든 일을 다 보여주는 신기한 거울도 있다면서요!」


호율은 언제나 호기심이 많았다. 세상에 난 지 고작 10년 밖에 되지 않았던 터였다. 옥빛 눈이 드물게 웃었다. 찬찬히 물어봐라, 숨넘어가겠다. 호율이 흐 웃었다. 다섯 살 터울 사촌지간이었던 둘은 한 배에서 태어난 친형제간 보다도 가까웠다. 형은 언제나 아우를 아꼈고, 아우는 형을 늘 잘 따랐었다. 형은 천지에 있는 때가 거의 없었다. 한달, 석달, 혹은 여섯 달을 넘도록 바깥에서 생활하다 이따금 천지로 돌아와 며칠씩 머무르곤 했다. 그때가 호율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도 형님 따라 가고 싶다… 바깥이 어떤지 보고 싶어요. 왜 장로들은 나만 못 나가게 하는 거야.」


장로들은 호율을 천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족장의 아들이고 아직 어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때문에 호율은 천지 바깥에 대해 늘 궁금해 했다. 형님은 호율에게 가지 못할 천지 바깥을 알려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호율은 늘 형님을 만날 때마다 말이 많아졌다. 형님은 말수가 적었지만 호율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호율은 그런 형님이 참 좋았다.

황금빛 눈이 다시 반짝거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아우의 눈을 형님은 잠잠히 내려다보았다. 마음 한 번 구겨진 적이 없는 아우의 눈은 그 심성처럼 찬연히 맑았다. 그 태가 퍽 귀여워 형님은 앞발을 스르륵 뻗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줄 생각이었다. 허나 채 닿기도 전에 발이 멈췄다. 차가운 목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순혈께서 어찌 이런 천한 핏줄과 어울리고 계십니까.’


호율이, 또 형님이 소리를 따라 같은 곳을 화급히 돌아보았다. 길 끝에서 흑단 자락을 급히 끌며 걸어오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흑단만큼 검고 아름다운 머리칼처럼 여인은 굉장한 미인이었지만 얼굴이 차가웠다. 어린 범들이 여인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어머니. 형님이 여인을 향해 말했다. 대꾸 없이 여인은 호율을 매섭게 돌아보았다. 호율과 꼭 닮은 황금빛 눈동자가 한겨울의 달처럼 차갑게 빛을 냈다.


‘장로들이 보면 경을 칠 일입니다. 어찌 감히 그 고귀한 태생께서 잡종과 어울리고 계시는지요.’

「하지만 큰어머니, 저는…!」

‘돌아가자.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제 할 말만 차갑게 던지면서 여인은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형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 뒤를 따랐다. 터에는 호율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호율은 오래도록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듯 사라지는 제 사촌 형님의 뒷모습을, 그리고 그보다 앞서 걸어가던 큰어머니의 뒷모습을.

형님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우물거리면서 호율은 작게 웅크려 앉았다. 어렵겠지. 황금빛 눈이 천장을 올려보았다. 유리를 덧댄 것 같은 말간 천장에 햇빛이 어렸다. 천지의 호족들에게 하늘은 저 천장이다. 호율은 아직도 진짜 하늘을 보지 못 했다. 아름답겠지. 작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백두산 천지의 물에 어른거리는 햇볕을 바라보며 호율은 소리 죽여 노래를 불렀다. 조금 전 형님이 읊고 있던 바로 그 창세의 노래였다. 아버지가 자주 불렀던, 장로들이 가르쳐주었던, 형님이 좋아했던, 호랑이를 섬기는 어느 인간의 부족들이 제사를 드리면서 부른다던 바로 그 노래. 세상을 창조한 호랑이의 노래.


「하늘에 태양이 없고, 하늘에 달이 없고—」


그때는 몰랐었다. 자신이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그 가사가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는지 호율은 몰랐다. 몰라서 행복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았었다. 하늘에 태양이 없고, 하늘에 달이 없다는 것. 애초에 하늘에는 태양과 달이 함께 뜰 수 없다는 사실을, 태양과 달 중 어느 하나는 반드시 저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호율은 몰랐다. 해가 져야 달이 오고, 달이 져야 해가 온다는 것을. 아침이 오기 위해서는 밤이 끝나야 한다는 것을, 밤이 오기 위해서는 아침이 끝나야 한다는 것을.


해가 달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달이 해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현관 앞이 왁 시끄러웠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였다.


“아, 안 된다고 했지, 내가!”


배우도, 대사의 억양도 점심 무렵과 다름이 없었다. 적어도 효경은 그랬다. 아까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호율일 것이다. 점심 무렵에는 효경의 침대 위에 앉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호율이 지금은 효경을 따라 현관 앞까지 쪼르르 쫓아 나와 있었다. 티셔츠도, 반바지도 언제 꺼낸 건지 착실하게 잘도 걸쳐 입었다. 효경이 뭐라 하건 말건 호율은 생글생글 웃었다. 그 얼굴 하나는 기가 막혔다. 엉덩이 뒤로 꼬리가 나와 있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왜요. 앞에 잠깐 장 보러 간다면서요? 그냥 같이 가면 되잖아.”

“이게 어디에서 아양이야. 야, 밖이 얼마나 위험한데!”

“나도 알 거 다 안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응? 같이 가요. 나 심심해요.”


그런 이유였다. 장 좀 보겠다고 잠깐 옷 좀 갈아입고 있으려니 이 야옹이는, 아니, 이 호랑이는 옆에서 옷장을 뒤지면서 저가 더 난리더니 현관을 나설 무렵에야 본색을 드러냈다. 효경이 아무리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데려가라, 싫다, 너 진짜 혼날래?를 반복하며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효경의 말꼬리는 자연히 높아졌다. 물론 갇혀 있으니 좀이야 쑤시겠지. 그 마음을 효경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석달동안 호율은, 믿기지 않게도 눈앞의 눈부신 미소년은, 고양이었다. 세상에, 너도 사람이 되었구나, 그럼 같이 산책할까? 라니. 그게 하루아침만에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안돼. 효경이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둥그렇게 휘어졌다. 살살 달래는 말투는 분명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러지 말구요. 응? 내가 짐 다 들어줄게요. 그리고 어차피 내 밥 사러 가는 거라면서요.”

“너 장본다는 게 뭔 줄 알아? 마트는. 편의점은?”

“다 알거든요. 물건 파는 곳이잖아. 편의점은 24시간씩 맨날 열려 있는 데고. TV에서 다 봤거든요.”

“TV랑 바깥이 다 똑같애? 횡단보도 건널 줄도 모르는 게.”

“와, 엄청 무시한다. 빨간 불에 서고 초록불에 가는 거잖아. 아니, 누굴 바보로 알아요?”


바보가 아니라, 너 고양이었잖아. 어물거려보다 효경은 관뒀다. 됐다. 나는 뭘 또 이런 걸 일일이 다 설명하고 있어. 저놈의 TV가 문제다. 이 참에 저 TV를 확 없애 버릴까. 생각하다 효경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내가 왜 이 고양이 때문에 보고 싶은 미드를 참아야 하는데? 생각하니 억울했고, 억울하니 더 생각을 하는 게 짜증이 났다. 그보다는 백기를 들었다는 표현이 적합하겠지만.


“아, 몰라! 가든가 말든가!”


황금색 눈이 둥그렇게 열렸다. 진짜죠? 아싸! 산책! 주먹까지 붕 흔들면서 호율은 현관에 놓여있던 효경의 운동화에 대충 발을 꿰어 넣었다. 그래놓고는 작다고 불평이었다. 옷 사이즈는 대충 비슷하더니… 하기야, 손이랑 발은 자기보다 좀 커보이긴 했었다. 키 차이는 별로 안 나지만. 그럼 가는 김에 입힐 거랑 신길 것도 좀 사야겠다. 생각을 삼키면서 효경은 현관문을 훌쩍 열었다. 호율이 부리나케 효경의 뒤를 따라 나섰다. 문을 잠그면서 효경은 잠깐 호율을 슥 쳐다보았다. 아이보리색 기본 면티, 청반바지에 대충 운동화 하나 꿰어 신었을 뿐인데도 기가 막히게 태가 좋았다. 저런 존재는 세상에 주은호 뿐일 줄 알았는데. 생각에 효경은 잠깐 눈썹을 좁혔다, 말았다. 저건 홀로그램이다. 아니면 2D든가.


“가서 말썽 부리기만 해봐.”

“응, 안 부릴게요. 말 잘 들을게.”

“말은 잘 하네. 알지? 말썽 부리면 진짜 버리고 올 거야.”


걱정마요. 호율이 씩 웃었다. 욕쟁이 할머니도 살살 녹여버릴 웃음을 지어가면서 호율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지구 끝까지 쫓아갈 거니까. 효경이 허 웃었다. 어이가 없었다.


“…너 스토킹에 재능 있는 거 아냐?”

“그러게요. 그러니까 버리기만 해봐요.”

“감옥이라는 데를 니가 모르는구나. 경찰서 한 번 가보고 싶지, 어!?”

“그까짓 거 다 물어 죽이고 도망치지, 뭐. 어차피 호랑이잖아요, 하하.”

“……”

“농담이에요.”


가요. 호율이 팔을 잡아끌며 환하게 웃었다. 하늘 끝이 붉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갈궈 줄까, 하다가 효경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진심 같아서.









마트에 도착할 무렵엔 이미 해가 거의 저물었다. 저녁을 목전에 둔 마트는 제법 북적거렸다. 북새통에 카트 하나를 겨우 선점하고 효경은 호율과 함께 식품 매장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릴 때 호율은 효경이 잡고 있던 카트를 냅다 빼앗아 착실히 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눈은 온 사방을 향해 정신없이 굴러갔다. 그 얼굴엔 효경도 좀 웃음이 났다. 세상 다 아는 것처럼 뻗대도 신기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아까부터 사실 줄곧 묻고 싶었다.


“근데 왜 그렇게 잘 알아?”


과일 코너를 기웃거리던 황금색 눈동자가 효경을 돌아봤다. 뭐가요? 효경이 사과 하나를 카트 속에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 전부.


“TV 켤 줄 아는 것도 그렇고, 횡단보도 신호 아는 것도 그렇고. 용변도 사람들처럼 화장실 썼었잖아, 너.”

“아, 뭐. 그런 건 별로 안 어렵잖아요. 호족이 완전히 짐승인 것도 아니고.”

“지난 세 달동안 고양이였거든, 너는.”


상식적으로 하루만에 찾아온 이 변화가 효경에게 쉽게 납득이 될 리가 없었다. 우리집 야옹이가 나랑 나란히 서서 저녁 장을 보겠다고 마트에서 카트를 밀고 있는 이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지만. 호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담담한 얼굴이었다.


“뭐, 여기 오기 전에 인간하고 살았었거든요.”

“다른 주인이 있었어?”

“아니, 아뇨. 주인은 아니고…”


저만치에 서 있던 직원 둘이 호율을 바라보면서 소곤거렸다. 외국앤가봐, 아이돌인가? 예쁘게 생겼다. 하지만 호율도 효경도 듣지 못 했다.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호율은 카트를 주르륵 밀면서 잠시 말을 삼켰다. 황금색 눈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곧바로 정리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효경은 인내심이 긴 편이 아니었다. 사과를 하나 더 집어 들면서 긴 눈꼬리가 채근하듯 되물었다. 아, 뭐냐고. 그제야 호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러니까.


“너처럼 나랑 같이 살면서 챙겨주고 귀여워해주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어요. 그냥 때 되면 밥 주고, 물주고, 잘 있나 들여다보고, 나갈 때는 도망가지 말라고 문 잠그고, 감시하고. 뭐 그런 거?”

“뭐야, 그거? 꼭 서커스나 동물원 같잖…”

“아, 그래요. 그거다. 맞아요, 그거. 여기보다는 좀 더운 나라였지만.”

“……”

“많이 걷어차더라구요.”


호율이 씩 웃었다. 효경이 눈을 열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웃는 지를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할 거면 차라리 화를 내지. 아니면 속상한 얼굴이라도 하든가. 그러면 차라리 짜증을 내든지 그 새끼들 미친 거 아니냐고 욕이라도 해줬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건 호율의 얼굴이 너무 밝아서 그랬다. 호율은 웃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호율은 웃으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효경은 어쩐지 자꾸 마음이 아팠다. 가슴 안쪽에 돌이라도 걸린 것처럼 자꾸만 덜그럭거렸다.


“그 방이 되게 좁고 더웠어요. 선풍기 같은 건 당연히 있을 턱이 없고. 거기가 되게 오지였거든요. 전기도 잘 안 들어온다고 그러더라구요.”

“미친, 그딴 데서… 흠. 그러니까, 거기에서 같이 살았던 거야?”

“네, 같이. 살긴 했죠. 나는 우리 속에 들어 있고, 저쪽엔 총이랑 칼 같은 거 차고 있는 아저씨들이 지키고 있고. 맞다. 니가 나 데리고 병원 갈 때 산 그 이동장 있잖아요? 그것보다 좁은 우리였어요. 그런 데서도 어떻게 살아지긴 하더라구요. 웃기죠.”

“……”

“뭐라더라. 필리핀 정부 반군이랬었나? 대충 그런 거였어요. 그래서 사람들 싸우는 건 참 지겹게도 봤죠.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창밖에서 총소리 같은 게 들려요. 그러다 며칠 있으면 사람들이 찬송가인지 뭔지 하는 노래를 부르고, 그러면 날 감시하던 아저씨가 다른 아저씨로 바뀌어 있고. 또 두어 달 지나면 그 사람이 또 바뀌고…”

“……”

“거기에서 한 10년 있었어요. 그전에는 인도였나, 어디 서커스단에 있었고. 아, 그래도 거긴 고기는 자주 줬는데. 단장 딸이 나를 되게 귀여워했었거든요. 근데 어느 날인가부터 안 보이더라구요. 얼핏 듣기로 시집을 갔댔나. 서커스단에 자주 오던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를 따라 갔대요. 나만큼 어리던 애였는데. 열 살이랬거든요.”

“……”

“근데, 그건 언제까지 들고 있을 거예요? 들어줄까요?”


그제야 효경이 제 손을 쳐다보았다. 붉은 사과가 아직도 손 안에 뿌듯이 쥐어져 있었다. 아. 맞다. 답지 않게 얼빠진 소릴 내면서 효경이 뒤늦게 사과를 카트 속에 넣었다. 호율이 효경을 빤히 쳐다봤다. 웬 일로 효경이 조용했다. 눈길을 떨어뜨린 긴 눈꼬리를 따라 호율이 노란 눈 끝을 스르륵 접었다. 그 채로 호율은 효경에게 오히려 물었다. 괜찮아요? 효경이 눈을 들며 탁 되받아쳤다. 뭐가? 그제야 눈이 마주쳤다. 호율이 웃었다. 지금까지의 얘기처럼 담담한, 그리고 어른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런 얘기 별로죠? 하긴, 내가 들어도 좀 그래. 기분 좋은 얘기 할까요?”

“바보야, 누가 기분 별로래? 나는 딱히!…”

“……”

“…미안.”


우물거리던 효경이 눈끝을 스르륵 떨어뜨렸다. 왜 당신이 사과를 해, 나쁜 건 당신이 아닌데. 그런 생각들을 우물거려보다 호율은 이내 말았다. 그래도 그 말이 호율은 딱히 싫지 않았다. 지난 석 달간 지켜봤던 지효경이 그랬던 것처럼.


“아, 그래. 스팸! 스팸 사야 되잖아! 어디 있지? 저긴가?”


짜증이 많다. 그만큼 눈물도 많다. 말을 가려하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무례하지 않다. 솔직한만큼 정이 많았다. 고양이를 처음 키우는 탓에 매일 핸드폰을 붙잡고 검색을 하던 당신은 아무리 바깥에서 술을 마셔도 외박을 하지 않는다. 야옹이라는 이름을 대강 붙여놓고도 누가 그 이름으로 놀리면 화를 냈고, 집에 돌아오면 옷을 갈아입기 전에 키우는 고양이의 저녁부터 확인하는 사람. 그게 지효경이었다. 당신은 나를 붙잡고 자주 웃었고, 또 자주 울었다. 덕분에 당신 자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많은 당신을 나는 알아 버렸다. 시리즈 미드를 자주 보는 당신, 그 중에서도 특히 추리물을 좋아하는 당신, 커플을 보면 짜증이 난다고 로맨스 드라마를 보지 않던 당신, 그래도 누군가를 좋아하던 당신. 가끔 신이 나서 잔뜩 멋을 내고 나갔다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와선 나를 끌어안고 펑펑 울던 당신.

그러니까 마음이 너무 약하다니까. 생각하며 호율은 눈을 느리게 접으며 웃었다. 앞에선 갈색머리가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식품코너 쪽을 기웃거렸다. 귀엽다. 노란 눈이 호선을 그렸다. 그래도 모르는 척 호율은 효경이 바라보던 방향을 향해 카트의 머리를 돌렸다. 대화의 화제도 함께 방향을 틀었다.


“아, 맞다. 천지 얘기 해줄까요? 나중에 같이 가요.”


효경이 호율을 짧게 돌아보며 물었다. 천지 좋아? 호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엄청 좋아요. 낙원이 이런 데구나, 할 걸요. 가서 우리 엄마 소개해 주고 싶다.”

“너희 엄마 되게 미인이실 것 같아.”

“미인이에요. 진짜. 천지 최고라니까 말 다 한 거지. 천지가 자랑하는 꽃이 둘 있거든요. 달맞이꽃, 그리고 제비꽃. 우리 엄마는 달맞이꽃이래요.”

“정말로 미인이신가보네.”

“응, 진짜로. 몸이 약하셔서 거의 집에서만 지내시지만요. 정말 미인이에요.”

“너는 누구 닮았어?”

“아빠요. 난 아빠랑 대고 긁었대요. 장로들이 그러더라구요.”


뭐, 우리 아빠도 내가 자란 얼굴은 못 봤지만. 호율이 작게 우물거렸다. 그 탓에 효경은 호율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 했다. 뭐? 되묻는 말에 호율이 씩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다 걸음이 우뚝 멈췄다. 황금색 눈동자가 한 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또 뭐야. 효경이 별 생각 없이 호율의 시선을 따라 같은 곳을 돌아봤다. 열 걸음 앞에 놓여 있던 것은 붉은 진열장이었다. 진열장 위에는 위와 같은 표지판이 따박따박 걸려 있었을 것이다. 육류.

설마. 꼬리가 긴 눈이 부슬부슬 웃었다. 아니겠지.


“호율아.”

“……”

“저기 호ㅇ… 야? 야! 야, 이 망할 고양이야!”


설마, 하는 순간 카트가 먼저 호율의 손을 떠났다. 색 밝은 머리칼이 바람처럼 흩날렸다. 잡을 새도 없이 호율은 단 걸음에 진열장을 향해, 그야말로, 날아갔다. 효경이 정신을 차렸을 때 호율은 이미 진열장의 유리판에 양 손을 딱 붙이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생닭과 잘 포장된 소며 돼지들의 보얗고 불그스름한 살집을 들여다보면서 호율이 군침을 꿀꺽 삼켰다. 엄마.


“천지만 낙원인 줄 알았는데.”


이곳이 진정 낙원이었다. 맹수들의 유토피아.







* * *


어둠이 창을 넘어 방안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홍대, 밤이었다.

천장이 낮은 실내는 꽤 넓었다. 한국 전통 격자무늬를 덧댄 창은 몹시 컸고, 점점이 매달린 등불에선 은은한 빛이 따스하게 쏟아져 내렸다. 벽지 대신 흙을 바른 벽 안에선 세월의 낡은 냄새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아마도 방을 가로지르며 놓여 있던 서가(書架) 덕분이었을 것이다. 곳곳에 쌓여있는 책들은 얼핏 보아도 오래 되었고, 선반 한 구석에는 칸칸마다 약재들을 정리한 작은 서랍이 있었다. 밟을 때마다 나무 특유의 기척을 내는 마루에선 비를 맞고 오랜 세월을 견뎌냈을 소나무의 깊은 향이 피어올랐다.

이찬은 마루 위에 길게 엎드린 채 누워 있었다. 고서적을 펄럭거리면서 이찬은 흐읍, 길게 호흡을 들이키며 공기 중에 떠도는 향을 맡았다. 좋네. 감탄하며 이찬이 둥그런 눈을 개구지게 접었다.


“할배는 찻집 열면 대박 날 텐데.”


저만치에서 차를 우려내고 있던 긴 머리칼의 남자가 잠잠히 웃었다. 꼭 화선지에 먹을 찍어 유려히 그려낸 것 같은 웃음이었다. 남자에겐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다기(茶器)에 차를 나눠 따르며 남자는 점잖게 말을 받았다.


“찻집도 수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네가 한 번 해보지 그러냐.”


허. 이찬이 서책을 덮으며 벌렁 자세를 뒤집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대답했다. 절대요.


“나는 뭐 만드는 재주가 꽝이라서 안돼요. 할배도 그랬잖아요. 한 번만 더 나더러 차 끓이라고 했다가는 사람 여럿 죽일 거라면서.”

“대신 네게는 사람 모으는 재주가 있지 않느냐. 사람을 모으고 네 편으로 만드는 그것이 수완이다.”

“그러네요. 하기야, 누가 그러더라. 미친 친화력이라고.”


절로 프 웃음이 났다. 그 말을 했던 얼굴이 떠올랐던 덕분이었다. 제 이름을 부를 땐 말꼬리부터 확 올려놓는 그 말투와 치켜뜨는 긴 눈꼬리가 어쩐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저를 보면 웃기보다는 짜증을 내고 잘 토라지는 녀석. 그게 귀엽지, 넌. 웃는 것도 예쁘지만 삐치거나 토라졌을 때가 사실 가장 예뻤다. 아, 이건 단순히 내 취향인가. 생각에 이찬이 또 한 번 소리 내 웃었다. 그냥, 웃음이 나서.

곁으로 다가온 남자가 차 한 잔을 이찬에게 내밀었다. 이찬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차를 받았다. 잘 마실게요. 꾸벅 인사를 하고 먼저 차의 향부터 음미했다. 남자가 잔을 쥐고 마주 앉았다. 잔을 감싸 쥔 남자의 손은 얼굴 생김만큼이나 하얗고 섬세했다. 마주 건배를 들고 남자와 이찬이 동시에 첫 모금을 후르륵 들이켰다. 오, 맛있다. 이찬이 눈을 둥그렇게 열며 감탄했다. 차도, 차를 담고 있는 다기의 생김도 모자람이 없었다. 차는 눈으로 먼저 마시는 것이라더니. 생각하며 이찬은 잠시 저가 들고 있는 찻잔을 쳐다보았다. 찻잔에는 하얀 몸체에 검은 줄무늬를 휘어감은 백호가 그려져 있었다.


“국회의원 오정웅이 죽었대요.”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이찬이 말했다. 여당실세 오정웅, 그 오정웅.


“뭐, 경인 고속도로 갓길에 세워져 있던 차 안에서 발견됐댔나. 사인은 일단 심장마비라는 것 같고. 뉴스에선 그러더라구요. 최근에 이런저런 일정들 때문에 바빴다고, 그리고 본래 연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고 있었다고. 듣자하니 그 검진 과목 중에 심장도 있었나봐요. 그래서 본래 심장이 나빴다나, 뭐라나. 돈만 주면 더 추가해주는 과목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진심이에요? 아니죠? 나는 그렇다 쳐도 할배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오의원이 누군지는 할배가 더 잘 알면서.”

“……”

“호족이 장난친 거지.”


이찬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답이 없는 남자를 추궁하는 대신 이찬은 남자를 슥 건너보았다. 남자는 이찬과 꼭 같은 찻잔을 쥐고 있었다. 생긴 모양도, 크기도, 그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것도 똑같다. 다만 보통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남자의 잔과는 달리 이찬의 잔에 그려진 것은 백호였다. 하얀 털에 파란 눈이 선명히 빛나는 백호.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모든 호랑이들 중에서도 백호가 가장 상서롭다 하였다. 동서남북 사방 중 서쪽을 지키는 하늘의 문지기이며 신령한 존재.

생각해보다 이찬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신령은 개뿔. 그래봐야 결국 돌연변이지. 웃음을 걷으며 이찬은 다시 잔을 기울였다. 여전히 차는 맛이 좋았다.


“뭐, 사실 누가 죽어도 나랑은 크게 관계없어요. 할배도 알고 있잖아요. 호랑이니 범이니 호족이니 그딴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그냥 인간인데.”

“인간이기는 하나 선택을 받았지.”

“어. 선택. 씨발, 그 망할 ‘선택’. 그래도 할배, 이건 확실하게 해두자구요. 날 선택한 건 범이 아니거든요. 댁들이 섬기는 그 대단하신 ‘하늘’도 아니라고.”

“……”

“지효경이지.”


둥그런 눈이 쓰게 웃었다. 참 오래된 기억이다. 아득히 먼 기억, 그리고 대단한 기억. 얼마나 대단한지 너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참, 엄청난 기억. 남자가 말없이 이찬을 잠잠히 쳐다보았다. 잠시 한숨을 삼키면서 이찬은 남은 차를 천천히 털어 넣었다. 남자가 이찬을 소리 없이 불렀다. 이찬에게는 이름보다 더 익숙한 애칭이었다. 아가.


“어차피 하늘이 정한 일이다. 네가 고집을 부린다고 하여 세상의 섭리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네가 이리 고집을 부리면 천지에서는 더…”

“어, 큰일 나죠. 그러니까 할배가 나랑 이러고 있는 거잖아. 나 같이 새파란 어린 놈 눈치만 맨날 보고 계시잖아요. 할배처럼 귀한 분이.”

“아가.”

“그러니까,”

“……”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설득도 하려고 하지 마요, 할배. 내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나는 범이 진짜 싫거든요. 뭐, 내가 싫어한다고 해서 바뀔 건 어차피 없겠지만.”


좋은 시절 다 끝났네, 나는. 일그러진 눈가에 이내 웃음이 번졌다. 개구지게 입매를 밀어 올리며 이찬이 빈 잔을 흔들었다. 한 잔 더 줄 거죠? 넉살 좋게 덧붙인 말에 남자가 잠시 눈을 열다, 이내 웃었다. 맑고 온화한 웃음이었다. 마치 지금은 어둠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빛처럼. 해처럼.






* * *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 살겠다고!”


마트의 주차장에 데시벨 높은 소리가 쨍쨍 울렸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잠시 소리의 진원을 돌아보았다. 주차장 한쪽에서 한 소년이 씩씩 소리를 높였고, 또 한 소년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소시지를 까먹고 있었다. 싸우나. 생각하다 사람들은 시선을 돌리고는 무심히 제 갈 길을 향해 신촌의 어둠 속으로 바삐 사라졌다. 갈색 머리 소년이, 그러니까 조금 전 고함을 치고 있던 그 소년이 답답한지 퍽퍽 제 가슴을 쳤다. 그래도 쪼그리고 앉은 소년은 꿋꿋하게 소시지를 까먹었다. 붉은 끈을 주욱 끌어내리면서 소년은, 호율이 빙글빙글 웃었다. 보통 천연덕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에이, 또 화낸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요.”

“뭘 그런 걸? 뭘 그런 걸!? 이 바보야, 너 때문에 나는 이제 이 마트 두 번은 못 오거든?!”

“장이야 딴 데 가서 보면 되지. 길 건너에 백화점도 있잖아요.”


갈색 머리 소년이, 그러니까 효경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기가 막혔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고, 웃으면 복이 온다는다는 소리는 대체 어느 멍청이가 한 것일까. 그딴 말을 하니까 이런 놈들이 자꾸 비실비실 웃는 거 아니냐고. 화도 못 내게. 정말로 할 말 없게 만드는 미소였다. 패션의 완성만 얼굴인 줄 알았더니 웃음의 완성도 얼굴이고 분노의 종지부도 얼굴이다. 지금 효경의 기분은 딱 이랬다. 2D한테 성질내는 기분. 문제는 호율보다도 호율의 곁에 쌓여있던 저 불룩한 비닐봉투였다.

누가 본다면 장을 거하게 보셨느냐 하시겠지. 하지만 저 안에 담긴 것의 80퍼센트가 고기라고 한다면 그 누가 믿겠는가. 이제 곧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이 장모님에게 보내는 고기도 저만한 양은 아닐 것이다. 누가 봐도 20대 남자가 홀로 자취하는 집에서 소비할 양도, 품목도 아니었다. 명절에도 저렇게는 안 먹는다. 이 고양이 새끼를 진짜, 내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은 호율이었다. 정확하게 말해, 육류 코너를 보자마자 이성을 간단하게 허공에 날린 호율이 끝내 본능을 참지 못하고 진열장을 흔들어댄 탓이었다. 설마 그걸 흔들었다고 유리에 금이 갈 줄이야. 뒤쫓아 온 효경은 선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게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제 탓은 일단 차치하고, 육류 코너 곁에 서 있던 직원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져 가던 것을 효경은 똑똑히 보았다. 서둘러 후다닥 호율을 떼어냈지만 유리에는 이미 겨울날 잔가지 같은 실금이 어느 유명 화가의 그림처럼 그어진 후였다. 곤란해 하는 남자 직원에게 효경이 거푸 사과하는동안에도 호율은 진열장 앞을 떠날 줄을 몰랐다. 매니저까지 달려나오며 진열장 주변은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괜찮다, 이 정도 일은 벌어질 수 있다며 매니저는 오히려 효경을 위로했다. 그래도 쉽게 깨질 유리가 아니라며 의아해하던 매니저에게 효경은 결국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세방과 함께 건네받은 엄마 명의의 카드를 손에 꼭 쥔 채로 효경은 우물거렸다. 그냥, 이 안에 있는 고기 다 주세요.

이게 자식 키우는 부모의 마음일까. 그래도 좋다고 고기 봉지를 끌어안고 히히 웃고 있는 호율을 보며 효경은 생각했다. 급할 때만 쓰라던 카드는 다음 달이면 정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엄마한테 죽든가.


“진작 알바 할 걸…”


경고는 이미 지난 달, 아니, 그보다 더 앞선 달에도 날아왔다. 효경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자신의 성격 중 많은 부분은 엄마가 물려준 것이었고, 엄마 역시 이와 같은 상황을 절대 그냥 참아주는 타입이 아니었다. 지난 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엄마는 카드결제일로 예상되는 10일날에 귀신처럼 전화를 걸어와선 요즘 생활비 지출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면서 데시벨을 높였었다. 너 연애 하는 거 아냐? 그 말에 효경은 대꾸도 하지 못했다. 연애가 오히려 다행이었다. 고양이 밥값 감당하다 이 사단이 났다고 하면 엄마는 이렇게 말할 위인이었다. 버려.

게다가 엄마는 상상도 못 하겠지. 엄마가 아는 아들 지효경은 고양이를 무서워한다. 그 지효경이 고양이를 키우고 있고, 이 고양이가 사료도 아니고 스팸을 엄청나게 해치워서 밥값이 감당 안 된다고 하면… 나도 안 믿겠다. 너 혹시 빚진 거 아니냐, 서울에서 무슨 큰 사고 친 거 아니냐고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효경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건 답이 없다.

길게 한숨이 터졌다. 풀이 죽어서 푹 쪼그리고 앉는 효경을 호율이 빤히 쳐다봤다. 얼굴이 어두웠다. 그 탓에 호율은 조금 미안해졌다. 아무리 인간이 된지 이틀이고 몰랐다고 해도 저 기분을 모를 리가 없는 탓이었다. 조절을 했어야 했는데, 참았어야 했는데. 생각과 함께 호율이 입술 끝을 질근거렸다.

호족은 인간보다 본능의 충동이 더 강하다. 반절 정도는 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 섞여 살기 위해서 호족들은 성호가 될 무렵부터 여러 훈련을 통해 본능을 억제하는 기술을 익힌다. 호율은 그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조절할 수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 적어도 맹안(盲眼)만 쓸 수 있었다면.

내 탓이야. 생각에 호율은 어쩐지 풀이 죽었다. 조금 전까지 잘 먹고 있던 소시지도 어쩐지 맛이 없었다. 효경을 쳐다보며 호율이 불쑥 말을 꺼냈다. 사과였다.


“미안해요.”


효경이 호율을 돌아보다, 이내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뭐가 또 너 때문이야. 괜찮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의미는 충분히 전해졌다. 어떻게 하지. 호율은 생각했다. 이 하얀 인간한테 뭐라도 해주고 싶다. 적어도 사과 표시는 하고 싶었다.


“돈 벌어줄까요?”

“……”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게 그것 뿐이거든요.”


눈꼬리가 기다란 눈이 둥그렇게 열렸다. 얼척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돈 얘기도 뜬금이 없는데 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니. 얹혀사는 객식구가, 그보다는 길러지고 있는 애완동물이 할 대사로는 영 적절하지 않았다. 효경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 웃었다. 돈은 무슨.


“됐거든. 돈은 무슨 수로 벌게?”

“수가 있으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겠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런 소리 함부로 하면 진짜 혼난다. 바보야, 돈 버는 게 쉬워? 왜. 어디 가서 재주넘기라도 하게?”

“서커스 같은 건 진짜 싫지만 못할 건 아닌데.”

“……”

“호족은 받은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하거든요. 그게 우리들 규칙이에요. 지난 석달동안 신세진 것도 있잖아요.”


효경이 눈을 샐쭉 흘겼다. 은혜 갚은 호랑이도 아니고. 그래도 서커스는 싫다. 그건 내가 싫어. 그런 말을 하는 대신 효경은 괜히 앞에 놓여있던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돌은 생각보다 먼 거리를 굴러갔다. 효경도, 그리고 호율도 굴러가는 돌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다 돌이 툭 멈췄을 때 호율이 불쑥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뜬금은 없었다.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내일 나 좀 어디에 데려가 줄 수 있어요?”

“어딜?”

“북촌.”


효경이 잠깐 뜨악한 눈을 했다. 북촌은 어떻게 아는 거야, 또.


“북촌은 왜.”

“만나야할 사람이 거기에 있거든요.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내 뒤를 부탁 받은 사람이래요.”

“뒤? 뒤를 왜 부탁받아?”

“말했잖아요. 내가 죽어야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

“또 우울해지네요, 얼굴이.”


갈색 눈 끝을 추욱 떨어뜨리다 효경은 홱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은 늘 이렇다. 쉽게 웃고 쉽게 화내고, 금세 미안해하고 금세 우울해진다. 자기 일이 아닌데도 가끔은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자기 일도 아니면서 자기 일처럼 아파한다. 그러니까 당신은 마음이 너무 약하다니까. 생각을 삼키면서 호율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씨익 웃으며 호율은 말했다. 괜찮아요.

당신 곁에 있으면 어쩐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내가 안 죽으면 되지, 뭐. 그쵸? 그러니까 내일은 북촌 같이 가요. 아, 맞다. 버스. 나 그 버스라는 거 타보고 싶어요.”

“관광 왔어? 아주 이러다가 가이드도 해달라고 그러겠네.”

“지효경하고는 관광보단 짝짓기를 하고 싶은데.”


따악, 소리가 경쾌하게 어둠을 갈랐다.








* * *



쨍그랑 소리가 울렸다.


차주전자를 든 채로 남자가 이찬을 돌아보았다. 괜찮느냐? 걱정스럽게 물어온 말에 이찬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충 대꾸했다. 괜찮아요. 발치에는 찻잔의 파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손이 미끄러진 탓에 찻잔이 떨어졌다. 순간 잽싸게 피한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다. 할배 따라 괜히 일어섰다가 잔만 놓쳤네. 이찬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채로 이찬은 가만히 깨진 파편을 내려 보았다. 반토막으로 갈라진 백호의 꼬리 곁에 그 다기를 만든, 혹은 그 그림을 그린 듯한 이의 호인 듯한 인장이 박혀 있었다. 懷杣. 한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이찬이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할배.


“오랜만에 북촌에 가봐야겠어요.”

“……”

“인사는 받아줘야지.”


창 너머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이제 곧 밤이었다.


(8편에서)







-

어쩐지 작업 시간이 징하게 길다 했더니 양이 엄청났네요. 근 만칠천자라니..

-

효경이네 가서 저녁 얻어먹고 싶은 밤입니다. 소고기... 소....





▶ 피드백은 트위터 @trickse_r 또는 애스크 https://ask.fm/rukaruka


글을 씁니다. | 트위터 @ruka_tea

루카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댓글을 사용하지 않는 블로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