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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아, 야옹아 ~05

1차 창작 BL


「하늘에 아무 것도 없네. 땅에 나무가 없고, 땅에 나무뿌리가 없고 -」

하늘 아래 천지가 있고, 천지 아래 호족들이 살았다. 천지의 너른 못 아래는 언제나 평화로웠다. 넓고 넓은 천지 강바닥을 지붕으로 삼은 백두산의 깊은 굴은 호족의 반만년 역사동안 단 한 번도 이방인의 습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호랑이를 닮았다는 한반도의 지형에서도 백두산은 호랑이의 턱이었다. 이곳에서 단군은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 겨레가 시작된 곳, 나라가 시작된 곳. 그리하여 역사가 시작된 곳. 이곳은 범의 고향이자 성지였다.

범의 성지는 천지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금으로 입힌 기와채의 안뜰에서는 사시사철 과일이 마를 날이 없었고, 사방에는 온갖 풀의 향기가 그득했다. 황금 대문 앞을 지날 때마다 호족들, 그리고 호족들이 다스리는 모든 호랑이들은 저마다 기와를 향해 한 번씩 머리를 향해 조아려 절을 했다. 그러나 오로지 선택 받은 자들만이 이 문을 열 수 있었다.

오로지 족장과 족장 후보만이 성지를 접견한다. 족장의 직계 4촌 이내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십이지신이 새겨진 열 두 개의 문이 나왔다. 민족의 신(神)이자 세상의 신인 호족, 그중에서도 족장 후보들을 섬기며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열두 종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했다. 족장과 족장의 후계들은 호랑이를 포함하여 쥐부터 시작되는 문을 차례차례 넘어 성지로 향했다.

마지막 돼지의 문을 열면 안쪽에 문이 하나 더 나타났다.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들로 장식된 앞선 열두 개의 문과는 사뭇 달랐다. 굳게 닫힌 나무문은 낡았고, 허름했고, 금으로 짠 동아줄과 부적이 얼기설기 얽혀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이 문은 그 누구도 열 수 없었다. 족장도, 족장후보도 열 수 없다. 힘으로도 지혜로도 열리지 않았다.

늙은 장로들은 문 안쪽에 샘이 있다고 했다. 그들 역시 직접 그 안을 본 것은 아닐 터다. 백두산에서 오래도록 전해지는 전설 중 하나였다. 문 안쪽의 작은 샘에서 천지의 줄기가 시작된다고 했다. 태초에는 누구나 그 문을 드나들 수 있었으나 처음 이 땅에 나라를 세운 단군이라는 인간이 샘을 더렵혔고, 당대 족장이었던 호령이 크게 진노하여 문을 봉인해 닫아 버렸다. 그 후로 누구도 그 문을 열고 안쪽을 들여다보지 못 했다. 전설은 그렇게 전했다.

천지 아래 호족의 성지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장소였다. 늙은 장로의 옛 이야기와 구전되는 전설로만 전해지는 그곳, 아직까지 아무도 열지 못한 그 문. 이 땅의 반만년 모든 기운이 시작되는 이곳을 두고 호족들은 이렇게 부르며 섬겼다.

하늘 (昊).

열리지 않는 ‘하늘’ 앞에 호랑이가 두 마리 앉아 있었다. 장성한 수컷, 그리고 곁에 함께 있던 새끼였다. 성호(成虎)는 체구가 컸으나 늘씬하고 날렵하여 둔한 느낌이 없었다. 온몸을 휘어 감싼 황금색 털처럼 성호의 눈동자 역시 밝게 타는 노란 빛이었다. 마치 해와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성호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에 맞춰 호랑이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새끼는 한들한들 흔들리는 아비의 꼬리에 눈이 팔려 있었다. 인간 어른의 한 주먹 정도 크기 밖에 되지 않을 새끼는 참 작았고, 줄무늬 또한 흐려 얼핏 보아선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인 듯 했다. 그래도 황금색 털과 햇님 같은 눈동자는 제 아비와 꼭 닮았었다.

「호랑이 머리로 하늘 머리를 만들고, 호랑이 꼬리로 땅 꼬리를 만들고, 왼쪽 눈으로 태양을 만들고, 오른쪽 눈으로 달을 만들고―」


성호의 목소리는 다 큰 수컷치고는 고왔고 아련했다. 노래하던 그는 제 곁에 있던 새끼를 슬그머니 내려 보았다. 흔들리던 아비의 꼬리를 향해 작은 주먹을 흔들다 새끼는 그만 휘청했다. 아비가 부리나케 도톰한 앞발을 뻗어 훌쩍 넘어가려는 작은 몸을 받아냈다. 새끼가 눈을 둥그렇게 열었다. 성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고운, 허나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 먼 목소리가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내 아들아.


「내 작디작은 태양아.」


새끼가 아비의 앞발에 얼굴을 부비며 고르르 울었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성호가, 호족의 족장인 호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제 앞발에 작은 머리통을 찬찬히 비벼오는 몸짓에 호연은 혀를 내어 새끼를 부드럽게 핥았다. 따뜻한 체온에 새끼가, 호율이 작게 눈을 좁혔다. 그러다 불현듯 호율이 눈을 들어 제 아비를 올려보며 물었다.

「아버지, 저 너머엔 무엇이 있나요?」


낭랑한 목소리가 좁은 굴을 울렸다. 아직 자그마한 새끼치곤 크고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호연이 가만히 눈을 접으며 대답했다. 제 아들처럼 맑고 영롱한 목소리였다.


「하늘. 저곳에 ‘하늘’이 있단다, 아들아.」

「……」

「나는 ‘하늘’을 보지 못 했지. 네 아비도, 네 할아버지도, 네 증조부도…」


천지가 시작되는 근원이라고 했다. 호족이, 인간이, 또 이 세계가 태어난 곳. 허나 전설로만 전해지는 곳. 허나 갈 수 없다. 왜요? 호율이 물었다. 호연이 담담히 대답했다.


「아주 오랜 옛날에 호령(錟旻)이라는 크고 높은 어른께서 저 문을 굳게 걸어 잠그셨단다. 그때부터 저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 그 누구도 열 수가 없어.」

「아무도? 그럼 아버지도 열 수 없나요?」

「그래, 나도. 아무도 열 수가 없단다. 족장이 되어도 열리지 않아.」


호율은 금세 풀이 죽었다. 그런 게 어딨어요. 볼 멘 소리를 툭 뱉어놓으며 호율은 시무룩한 얼굴로 웅크렸다.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워 호연은 소리 없이 웃었다. 호율이 세상에 난 지는 고작 40년이었다. 완전한 성호가 되려면 아직 스무 해가 더 남았다. 배워야할 것들도, 자라야할 시간들도 많을 터였다. 허나 호율은 세상에 호기심이 많았다. 틈만 나면 사당에 데려가 달라 자신을 조르고 장로들을 괴롭혔던 족장의 아들은 하늘이 퍽 궁금한 모양이었다.

볼 수 없기에 궁금한 것이겠지. 호연이 소리 없이 생각을 삼켰다. 발톱을 완전히 감춘 앞발로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주자 불퉁거리던 호율의 얼굴이 다소 누그러졌다. 아이를 쓰다듬으며 호연은 다시 문 쪽을 돌아보았다. ‘하늘’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해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숨’을 가진 ‘생명’이 나타나면, 네가 그 ‘생명’을 품는다면.」

「열리나요? 하늘을 열 수 있나요?」


호연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율이 눈을 둥그렇게 열고 문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숨 붙은 모든 생명들이 저 하늘 너머를 보지 못 했다. 누구도 보지 못 했던 하늘, 감히 열 수 없던 하늘.

하지만 열 수도 있어. 호율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호연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는 찬찬히 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호연은 말했다. 옛 전설처럼 멀고 그리운 목소리였다.


「‘숨’을 삼키고 스스로 ‘생명’이 된 자. 네가 그를 취해 반려가 되면 하늘이 열리지. 헌데 반려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혼인… 아닌가요?」

「하하, 그래. 허나 정확히 말해 그가 너의 새끼를 배는 것이다.」

「……」

「그렇게 너의 새끼를 밴 ‘생명’을 무어라 부를까.」


호율은 너무 작고 어렸다. 반려와 혼인, 새끼를 밴다는 것에 대해 호율은 다 알 수 없었다. 영문 모르는 듯 갸웃거리는 제 아들을 보며 호연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도 어린 아들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만큼은 참으로 깊었었다. 세상의 많은 예언들을 담아두고 있는 천지처럼. 가장 도력이 깊고 영험한 호족의 족장처럼. 지킬 것이 많은 아버지처럼.


「운명.」

「……」

「하늘(旻)을 지고 태어난 나의 아들아. 그가 너의 운명이다.」


작은 범의 가슴이 뛰었다. 천지 위를 불어가는 바람처럼, 한반도의 바람처럼.















“아, 재미없다―”


침대 매트가 크게 출렁였다. 뒤로 벌렁 넘어지면서 호율은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을 집어 던졌다. 퍽 재미있게 훔쳐봤었던 드라마는 지효경이 없으니 영 지루했다. 효경은 드라마를 자주 본다. 더불어 굉장히 몰입하는 스타일이었다. 갑자기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으악 소리를 지르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면서도 화면에서 눈은 떼지 않았다. 게다가 말도 많았다. 저런 남자를 만나면 안 된다며 여주인공의 연애에 평가를 하고, 도망치라면서 화면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아직은 고양이에 불과했던 호율을 끌어안고서 효경은 드라마의 스토리와 관계 해석을 줄줄 읊기도 했다. 야옹아, 아무리 생각해도 범인은 저 남자인 것 같아, 그치? 그럴 때마다 호율은 효경의 품 안에서 야옹 울며 대답을 하기도 했다. 하여튼 잔소리쟁이라니까. 생각하다 호율은 프 웃었다. 그래서 지효경이 재미있었다. 지루할 새가 없어서.

근데 대체 언제 오는데. 황금색 눈을 울컥 구기면서 호율은 시계를 팩 쳐다보았다. 시계는 이제 고작 1시다. 지효경이 점심을 먹겠다면서 나간지 30분 정도 밖엔 지나지 않았다. 한 편의 절반을 겨우 넘긴 드라마에 호율은 이미 흥미가 뚝 떨어졌다. 아, 진짜 재미없다. 생각하며 호율은 천장을 향해 다시 똑바로 누웠다.

황금색 눈동자가 둥그렇게 열린 건 바로 그때였다. 둥그런 전등갓 근방에서 뭔가가 바람결에 맞춰 팔랑팔랑 흔들리고 있었다. 모빌이었다. 그 중에서도 샛노랗게 팔락거리던 날개에 호율은 단숨에 사로 잡혔다.


“나비다.”


나가기 전에 창을 열었던 건 효경이었다. 창문 틈으로 솔솔 불어드는 바람을 따라 나비는 하늘하늘 흔들리며 춤을 추었다. 효경은 지난봄의 어느 날, 입을 옷이 없다면서 쇼핑을 다녀오던 길에 모빌형 나비를 덤으로 사왔다. 이제 봄도 됐고 하니 집안 분위기를 환기 시켜보겠다던 말을 효경은 저 홀로 주절주절 잘도 떠들었었던가. 천장까지 키가 닿지 않아 식탁 의자까지 끌어와서 낑낑 달았던 모빌을 효경은 꽤 만족스러워 했었다. 무엇보다 호율이, 정확하게는 ‘야옹이’가 저 나비를 좋아했다. 야옹이는 모빌 아래 앉아 자주 나비를 올려다봤었다. 움직이는 것을 좇는 것은 모든 고양이과의 본능이다. 팔락팔락 흩날리는 날개가 가짜임을 뻔히 알면서도 야옹이는, 그리고 호율은 좀처럼 눈을 떼지 못 했다.

바람이 불었다. 매달려 있던 나비가 크게 원을 그리며 흔들렸다. 황금빛 눈동자가 번쩍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싸, 잡아야지—”


황금색 눈을 둥그렇게 접으며 호율이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은 완전히 나비를 향해 박혀 있었다. 침대 끝에 두 발로 서는 동작이 어쩐지 익숙했다. 예전에도 효경이 집을 비웠을 때마다 저 나비를 잡기 위해 몇 번이고 점프를 했고, 그때마다 호율은 번번이 굴러 떨어지며 실패했다. 고양이치고 좀 크기는 했으나 그래도 저 천장까지 닿기에 호율은 너무 작았었다. 하지만 이제 성호잖아, 나는. 호율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침대 끝에서 자세를 잡았다. 확실히 고양이일 적보다는 시야가 많이 높아졌다. 손만 뻗어도 닿겠는데? 생각하면서 호율은 먼저 손부터 성급하게 뻗어봤다. 닿을 듯 하면서도 나비는 바람결을 따라 저 편으로 파르르 날아갔다. 어쭈. 호율이 다시 한 번 팔을 길게 내뻗었다. 이번엔 좀 더 깊었다. 손끝에 챈다 싶었을 때 나비는 또 약을 올리듯 저만치로 부웅 날아갔다. 손을 뻗고 놓치기를 반복했다.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이게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지. 아득 이를 짧게 갈고 호율은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나비를 뚫을 듯 쫓으며 자세를 낮췄다. 실에 매달린 채로 나비는 바람을 따라 앞과 뒤를 일정하게 왕복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흔들리던 나비가 이쪽으로 떠밀린 순간이었다. 황금색 눈이 예리하게 좁아졌다. 접었던 무릎에 재빠르게 힘을 주며 호율은 날쌔게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유려한 몸이 허공을 난다 싶었을 때 나비가 잡혔다. 그때였다.


“아싸, 잡았…! 어, 어어어?!”


잡았다 싶었을 때 중력을 느꼈다. 부웅 떠오른 소년의 체구가 그대로 우당탕 추락했다. 난리도 아니었다. 버둥을 치던 다리에 하필이면 의자가 걸렸고, 그대로 호율은 의자와 함께 바닥을 요란하게 굴렀다. 엎어진 채로 호율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 더럽게 아파. 씨근거리며 호율은 천천히 땅을 짚으며 일어났다. 그러나 몸보다 다른 것이 더 빨랐을 것이다.

줄무늬가 휘어 감긴 황금빛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두툼한 앞발로 바닥을 짚으면서 호율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몸은 좀 전보다 컸다. 거대하고 유려한 몸체를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켜면서 호율은 제 몸을 무심히 슥 돌아보았다. 변했네. 색만큼은 여전한 황금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빙글빙글 웃었다. 도톰한 앞발 안에는 여전히 노란 나비가 움켜잡혀 있었다.


「헤헤, 잡았다.」


황금빛 호랑이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포획한 나비를 입에 물고 호율은 네 발로 땅을 짚으며 다시 훌쩍 침대로 올라앉았다. 나비를 질근거리면서 호율은 아주 잠깐 이 침대의 주인에 대해 떠올렸다.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또 호랑이라고 기절하려나. 그러다 이내 흐 웃고 말았다. 여기는 천지가 아냐. 그러니까 어차피 요즘 시간으로 30여분 정도만 지나가면 변신은 알아서 풀릴 것이다. 끝부분만 먹물에 콕 찍어놓은 듯한 꼬리가 기분 좋게 흔들렸다. 나비를 물고, 앞발로 톡톡 건드리면서 호율은 길게 하품을 했다. 졸렸다. 변해서 그런가. 하기야, 변신에는 도력이 많이 든다고 스승님도 그랬으니까.

조금만 잘까. 지효경이 돌아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일어나면 변신도 풀려 있겠지. 아, 그러면 나 또 알몸일 텐데. 이런 고민들을 주섬주섬 짚어보다 호율은 이내 또 생각을 접었다. 너는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만드는 재주가 비범하노라며 오래 전에 스승님도 그렇게 말했었다. 다시 길게 하품을 하면서 호율은 앞발에 풀썩 얼굴을 묻었다. 침대 곁에 놓인 협탁이 눈에 걸렸다. 협탁 위에 있는 것은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끌어안고 찍은 사진 액자였다. 이 사진은 호율이 오기 전부터 이 자리에 계속 놓여 있었다. 색 고운 노란빛 한복을 예쁘게 차려 입은 할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는 하얗고 눈꼬리가 퍽 길었다. 할머니의 얼굴을 참 많이 닮았다. 딱 봐도 지효경이었다. 졸린 눈을 끔벅거리면서 호율은 흐 웃었다.


「새끼 지효경.」


귀엽다. 우물거리면서 호율은 베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깜장 코에 바싹 붙은 베개에선 옅게 향내 같은 것이 났다. 그러고 보면 지효경은 늘 이런 냄새가 났었다. 향긋하고 달콤한, 그래서 괜히 장난처럼 혀를 한 번 스윽 내서 핥아보고 싶은 그런 향내.


「좋다.」


눈을 뜨면 지효경이 돌아와 있으면 좋겠다. 호율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누구나 듣기 싫은 말이 있다. 듣기 싫은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싫은 건 이거다. 듣기 싫을 말을 ‘또’ 듣는 것.


“미안.”


이찬이 효경을 향해 두 손을 합장하듯 마주 모으며 사과를 했다. 날씨는 참 더웠다. 계단을 걸어올라 실외로 나오기가 무섭게 효경은 햇살 탓에 오만상을 찌푸렸고, 은호는 그 뒤를 잠자코 따르면서 손부채질을 했다. 셋은 그 채로 잠시 길 중턱에 멈춰 다음 행선지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집에 갈까, 아니면 와우하러 PC방에라도 갈까. 집에 고양이가 기다리니 딱 1시간만 하자고 선수를 친 건 효경이었다. 그런데 이찬이 오늘따라 영 조용했다. 효경의 말에 은호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리는 동안에도 이찬은 한 걸음 뒤에서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효경이 이찬을 돌아보며 물었다. 넌 어쩔 건데? 그때 이찬이 대뜸 사과를 했다. 진짜로 미안. 그리고는 씩 웃으면서 이처럼 덧붙였다.


“둘이 가라. 나 이 근처에서 여자친구 만나기로 해서.”


표정관리가 잘 되고 있을까. 효경은 가장 먼저 그 생각을 했다. 입가가 떨리고 있으면 어떡하지. 입가는 괜찮았다. 그보단 제 성질에 먼저 울컥 쥐어지는 주먹이 문제였다. 더위 탓이야. 날씨가, 진짜, 좆같이 더워서 그래. 효경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말투는 별로 곱지 못 했다.


“또? 오늘도? 무슨 여자친구를 매일 만나!? 니네 어제 소개팅 했다며.”

“어제 소개팅을 했으니까 오늘 잘 해야지. 허, 우리 효경이. 연애 한 지 1년도 넘었다고 다 까먹었쪄?”


긴 눈꼬리가 있는대로 일그러졌다. 쪄는 무슨, 찜 쪄먹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친구들 만난다고 얘기 했다면서. 근데 뭘 벌써 만나는데? 왜. 문자로 그러냐? 서운하대? 보고 싶대? 걘 뭐하는 앤데 그래?”

“왜, 같이 갈래? 소개시켜줄게.”

“멍충아, 누가 니 여친 보고 싶대!?”

꽥 지른 소리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애매해졌다. 은호가 말없이 슥 효경을 돌아봤고, 이찬이 짧게 눈을 구겼다. 당황한 얼굴이었다. 효경이 그제야 아차 싶었다. 흥분했다.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 했다. 짜증이 나서 그래. 해이찬 저게 자꾸 열 뻗치게 하니까 그러는 거야. 생각에 효경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홱 돌렸다.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이러다 진짜 들킬 거야.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지효경. 눈살을 구겨가며 입술 끝만 질근거리는데 이찬이 슥 이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녀석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불쑥 뻗어온 손이 효경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둥그렇게 웃고 있는 눈길은 아무래도 달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채로 이찬이 슥 효경을 불렀다. 이름은 아니었다.

“애기야.”


목소리가 다정했다. 심지어 좋았다. 이 새끼는 진짜 나쁜 새끼야.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효경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 이찬 새끼야.


“자꾸 짜증 내면 우리 애기 이쁜 얼굴 미워지는데.”

“너 그놈의 애기 소리 좀 그만 하라고 내가…”

“아, 우리 애기 예쁘다. 허, 화내니까 더 예쁘네?”

“웃기고 자빠졌다. 미친놈아, 손 안 치워? 해이찬, 손 안 치우지?!”


이찬이 슬금슬금 손을 물리면서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러면서도 눈가엔 여전히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귀여워 죽겠는가보다. 그 얼굴에도 속이 후벼졌다. 너는 내가 그냥 동생 같고 애 같지. 친구로도 안 보이지, 내가. 그냥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 저런다. 장난을 치면 약발을 잘 받으니까 늘 짓궂게 굴지. 그뿐이다. 너는 나한테 진지함이라고는 1그램도 없어. 그런데도 눈이 마주치면 지는 건 언제나 효경이었다. 눈이 맞추면 짜증이 멈춘다. 스르르 웃어 주기라도 하면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아무리 놀리는 말이어도 사실 말을 걸어주는 게 늘 좋았다. 누가 그랬다. 먼저 좋아한 쪽이 항상 지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오늘도 졌어. 혀끝까지 넘어온 말을 효경은 가까스로 참아냈다. 한참만에야 효경은 툭 뱉어냈다. 애기 소리 하지마. 이찬이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래. 시선은 괜한 허공을 맴돌았다.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아직은 없었다.

“귀엽다는 소리도 하지마.”

“야, 귀여우니까 귀엽다고 하지.”

“하지 말라니까.”

“왜. 나쁜 말도 아니…”

“하지마.”

“……”

“그냥 아무한테도 하지마.”


그 여자한테 하지마.

사실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애기라고 다른 데선 안 불렀으면 좋겠다. 귀엽다는 소리도 함부로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너랑 나랑 어차피 안 되는 거 알아. 그리고 영원히 네가 이 마음 모를 것도 알아. 알아달라는 것도 아냐. 그럴 거면 그냥 영원히 나만 그렇게 불러주면 좋겠어. 애기라는 말, 귀엽다는 말. 네가 편하게 놀리고 장난치는 사람도 나뿐이면 좋겠어. 나만 듣고 싶고 나만 알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효경은 기운이 빠졌다. 알아, 어차피 그렇게는 안 된다는 거.

눈가가 시큰했다. 망할 햇빛. 효경이 눈을 한껏 찡그리며 하늘을 쳐다봤다. 은호는 여전히 조용했다. 이찬이 한참 효경을 쳐다봤다. 왜 쳐다봐, 남 속도 모르고. 생각할 때 낯선 촉각이 스르륵 뺨을 스쳤다. 효경이 저도 모르게 크게 어깨를 떨었다. 그게 네 손이라서 그랬다. 이찬이 슥 뺨을 만지면서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응.

“안 할게. 안 부를게. 내가 장난이 지나쳤어.”

“……”

“미안하다, 효경아.”

“됐어. 뭘 그렇게 또 진지하게 사과하고 있…”

“애기야.”

“…이 새끼가 진짜 끝까지.”


이번엔 참지 않았다. 한 대 쥐어박으려고 주먹을 확 뻗은 순간 허공을 헛돌았다. 맞을 줄 알았는지 이찬은 이미 잽싸게 한 발을 피한 뒤였다. 어오, 우리 애기 주먹은 역시 빨라. 농담처럼 가슴을 슥 쓸어내리더니 해이찬은 그대로 홱 돌아섰다. 간다.

그리고 또 덩그러니 둘만 남았다. 주은호랑.

“……”


역시 어색했다. 차라리 갈 거면 주은호 가고 가든가, 나쁜 놈아. 그런 원망을 잠깐 소리 없이 삼켰었던가. 그때 주은호가 먼저 말을 열었다. 홱 돌아서면서 낮은 목소리가 한 마디를 툭 밀어놓았다. 이번에도 여전히 주어와 목적어는 없었다.


“가자.”

“뭐? 어딜?”


효경이 묻는 말에 은호는 대답 없이 먼저 걸었다. 그 잠깐 사이에 거리는 금세도 벌어졌다. 하여튼 엄친아 새끼, 다리도 겁나 길어서. 키 커서 좋겠다, 이기적인 놈아. 생각을 짓씹으며 효경이 그제야 허겁지겁 은호의 뒤를 쫓았다. 쫓으면서도 효경은 거푸 물었다. 어디 가냐니까? 은호가 짧게 대답했다. 집.


“집? 무슨 집… 너희 집?”

“아니, 니네 집.”

“우리집을 니가 왜 가?”

“그냥.”

익숙한 대답이었다. 그래, 주은호는 주은호지. 내가 무슨 정성 어린 대답을 기대하겠냐, 너한테. 다만 생략된 행간만큼은 그냥 넘겨줄 수가 없었다. 왜가 없잖아. 왜 어디 갔는데. 왜 우리집에 가냐고, 니가. 생각에 효경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해는 여전히 높았다. 하여간 더럽게 더운 날이었다.

그러니까, 우리집을, 니가, 왜 가냐고. 한 절 한 절 끊어 말했다. 일부러 그랬다. 묵묵히 걷고 있던 커다란 등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주은호 등짝에 얼굴을 박을 뻔 했다. 은호가 효경을 슥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하여간 상판 하나는 기가 막혔다. 잘 생겼다. 그 채로 은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가 여름 공기를 부드럽게 울렸다.


“데려다준다고.”

“…왜?”

“더우니까.”


이번에도 그뿐이었다. 할 말은 다 한 모양인지 은호는 그대로 다시 시선을 돌리고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얘가 어제부터 더위를 먹었나, 왜 자꾸 안 하던 짓을 하지. 생각을 삼키며 효경은 잰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래도 그러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주은호는 한실장이 끌고 온 마이바흐를 타고 왔을 거고, 오늘 날씨는 버스만 기다리고 있기에는 정말로 더웠으니까.

“그냥.”


앞서 걸으며 은호가 우물거렸다. 뭐? 효경이 되물었다. 옆 차선에서 택시가 멈춰 서고, 손님은 문을 열어둔 채로 하차 하지 않고 꾸물거렸다. 뒷차들이 빵빵 클랙슨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효경은 은호의 다음 말도 듣지 못 했다.


“네가 궁금해서.”

“뭐? 안 들려. 아까부터 뭐라는…”

“알고 싶으니까.”


택시가 겨우 문을 닫고 출발했다. 도로는 그제야 다시 조용해졌다. 효경이 은호의 곁에 바싹 붙으며 다시 물었다. 뭐? 어쨌다고? 은호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낮은 목소리가 담담히 대꾸했다. 아니, 아무 것도. 효경이 픽 웃었다. 싱겁기는.

은호가 잠깐 효경을 잠자코 내려다봤다. 제 시선보다 꼭 반 뼘 정도가 낮은 곳에서 눈꼬리가 유독 긴 눈이 실없이 웃었다. 그 얼굴을 은호는 말없이 쳐다보다, 이내 슥 눈길을 돌렸다. 이번에도 역시 그뿐이었다.







* * *



홍대의 보도블록 위로 아른아른 아지랑이가 어렸다. 아침나절에 제법 선선했던 공기는 점심 무렵을 지나면서 완전히 달아올랐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도 성이 안 차는 듯 사람들은 저마다 부채질을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 틈을 비집으며 이찬이 경쾌하게 길 위를 걸었다. 어쩐지 자꾸 콧노래가 나왔다. 아마도 콜드플레이의 Viva la vida의 후렴구였을 것이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면서 이찬은 호텔 뒤로 뻗은 좁은 뒷길에 들어섰다. 길은 조용했고, 큰길만큼 찌는 듯이 덥지 않았다. 높다란 호텔이 만들어준 응달 덕분이었다. 식당들의 뒷문이 오밀조밀 모여 있던 길은 트럭 서너 대쯤은 세울 수 있을 공터에서 흐지부지 끊어져 버렸다. 막다른 곳이었다. 한때는 주차장으로 쓰였을 것 같은 공터는 이제 폐자재나 대형 가전제품들을 쌓아두는 폐허로 전락했다. 정면에 높게 뻗은 벽은 어느 건물의 뒷벽인지도 알기 어려웠다. 낡고 녹슨 쇠문 옆에 ‘철거 확정’이라는 노란 현수막이 펄럭거렸다. 현수막쪽을 바라보면서 이찬은 주머니에서 담배부터 꺼냈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빨았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연기를 흩으면서 이찬은 옅게 색을 뺀 짧은 갈색 머리를 버릇처럼 매만졌다. 오늘 머리는 저가 생각해도 참 잘 만들었다. 농담처럼 프 웃으며 이찬은 다시 한 모금을 후욱 빨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경 그만 하고 나와요.”


공터는 조용했다. 대답 대신 바람이 얕게 울었다. 하지만 이찬은 이 바람조차 대답이란 사실을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또 숨바꼭질 하시네. 중얼거리며, 이찬은 옅게 헛웃었다. 동시에 불현듯 이찬은 뒤를 홱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인기척은 느꼈다. 바람 속에서 누군가 웃었었다. 고개를 뒤로 돌린 채로 이찬이 다시 허 웃었다. 그리고 다시 현수막이 걸려 있던 벽 쪽을 돌아봤다. 아무도 없던 건물의 그림자 속에 누군가 있었다. 역시. 이찬이 씨익 웃었다. 머금었던 연기를 다시 뱉는 동작처럼 익숙한 얼굴이었다. 마치 오랜 친구에게 건네는 농담처럼.

다 큰 어른이 맨날 장난만 치시네. 말하며, 이찬이 물고 있던 담배의 불씨를 툭 떨궈냈다. 그림자가 잠잠히 입을 열었다. 남자였다. 그리고 참 고운 목소리였다.

“받는 쪽이 속아줘야 장난이 되는 것이지. 너야말로 참 신통방통하다.”

“새삼스럽게 또 왜 이러실까. 나 영재거든요.”


의기양양한 이찬의 말에 남자가 웃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이찬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와 이찬 사이에는 꼭 다섯 걸음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찬은 별로 불편하거나 껄끄러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이찬이 남자를 불렀다. 할배. 남자가 대답했다. 오냐. 이찬이 씩 웃었다.

“할배는 나 완전 칭찬해줘야 되는 거 알죠? 와, 내가 맨날 지효경 떨어뜨려 놓고 오느라 죽을 것 같은데.”

“허… 그 일이 그리 어렵더냐.”

“그럼요. 어렵지. 지효경인데 따돌리는 게 쉽겠냐고.”

“그래도 함부로는 말하지 말아라. 그 아이 중한 것은 나도 알고 너 또한 알지 않느냐.”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할배랑 이러고 있지.”


이찬이 개구지게 웃었다. 사탕을 함박 문 아이 같았다. 둥그런 눈을 장난스럽게 굴리면서 이찬은 농담처럼 우물거렸다. 아, 진짜 못 해 먹을 짓이야. 그리고 돌연 웃음이 사라졌다. 웃음이 완전히 지워져버린 눈매가 어둠 속을 꿰뚫을 듯 쳐다보았다. 날카로웠다. 동시에 차가웠다. 그 채로 이찬이 낮게 운을 뗐다. 웃는 법을 애초부터 모르는 것처럼.


“지효경은 안돼요.”

“…어찌하여.”

“내 꺼거든.”

“……”

“날 때부터 내 생의 절반이라고, 걔는.”


남자는 답이 없었다. N이 박혀 있던 운동화가 어둠 속에서 성큼 걸어 나왔다. 입꼬리를 밀며 이찬은 웃었다. 눈매에는 여전히 웃음이 없었다. 그 채로 이찬은 건조하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포기해요.


“호랑이 새끼한테도 안 줄 거니까.”


남자가 고요히 웃었다. 해가 천천히 기울던 오후, 4시였다.





(6편에서)







재미 붙인 김에 연휴의 마지막을 이 글로 닫아봅니다. 내일부터 출근이라니 믿을 수가 없는.......... (ㅜㅜ 6편도 또 부지런히 들고 오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__..♥



+ 글 초반에 호연이 부른 호랑이 관련 노래는 이족의 창세 신화에서 발췌했습니다. 이족은 호랑이를 섬기는 중국의 소수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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