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야옹아, 야옹아 ~04

1차 창작 BL

아침, 날이 좋았다. 여름의 한중간을 지나고 있다지만 공기는 청명했다. 해는 높았고 여느 여름처럼 습하지도 않았다. 유난히 새파란 하늘 끝에서 설탕 같은 구름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바람은 잔잔히 구름을 떠밀며 이따금씩 하얀 새털들을 하늘에 흩어 놓았다. 그림 같은 여름이었다. 구름이 종로에 우뚝 솟은 빌딩 곁을 찬찬히 흘러갔다.

종로 한복판에 우뚝 솟은 50층 빌딩은 유난히 하늘과 가까웠다. 그럼에도 건물에는 육중한 느낌이 없었다. 하늘까지 솟은 선은 유려했고 균형이 좋았다. 세계적인 랜드마크를 몇 곳이나 건설했다던 설계사의 포트폴리오에서도 상위 페이지를 차지한다며, 사람들은 건물을 향해 즐겨 떠들었다. 그야말로 종로의 명물이었다. 사람들은 지나치며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건물의 외벽을 올려보았다.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유리 외벽은 제 속을 보여주는 대신 세상의 풍경을 거울처럼 비추고는 했다. 그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빌딩에 걸려있는 제약회사의 로고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T 컴퍼니. 세상은 모두 그곳을 그렇게 불렀다. 관련 계열사를 모두 합친 자산의 규모만 십수조원. 본사에서 근무하는 임직원만 몇 천에 이르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제약 재벌이었다. 종각역을 빠져 나온 직원들은 50여 미터를 걸어가며 아메리카노와 토스트를 전투적으로 해치우며 종로의 랜드마크로 출근한다. 지하 3층부터 45층까지를 분주하게 오고가며 직원들은 오늘도 맡은 바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 건물의 최상위층에 무엇이 있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또 무엇을 숨기는지.

연두색 공이 테니스 코트 위를 데구르르 굴러갔다. 쾌청한 여름 아침, 종로에서도 하늘과 가장 가까운 건물의 옥상이었다.

옥상에 펼쳐진 코트는 들판처럼 짙은 초록이었다. 플라스틱 모조가 아닌 천연의 잔디는 매일 누군가 정성을 다해 관리를 하고 있는 모양인지 색조차 싱싱하고 푸르렀다. 모자란 것은 없었다. 선 베드와 테이블이 곳곳에 비치되어 있었고, 파라솔을 펼친 간이 드링크 바(Bar)는 틈틈이 마른 목을 축이기에 적합했다. 오늘 바에 놓인 잔은 모두 셋이었다. 그러나 잔은 비어 있지 않았다. 언더록의 위스키 위에서 얼음은 절반쯤 녹았다. 선 베드에 기댄 채로 남자는, 은호는 잠시 코트 위를 굴러가는 테니스 공을 쳐다보았다. 굴러간 공은 선 베드를 몇 발자국 남겨두고 이내 우뚝 멈췄다. 누군가의 무릎에 걸린 탓이었다. 은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라솔을 벗어난 준수한 눈매가 울컥 구겨졌다. 해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놓치셨다구요.”


코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희끗희끗 하얀 백발이 앉은 남자는 어림잡아도 50을 훌쩍 넘겼을 것이다. 남자는 조금 전까지 은호와 코앞의 코트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테니스 선수들이 즐겨 입는 브랜드의 의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친 것치고 남자의 플레이는 형편없었다. 남자는 은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 했다. 무릎 위에 얹은 남자의 주먹이 옅게 떨었다. 이번에는 은호를 대신 해 곁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온화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한정민이었다.


“제가 분명히 말씀 드렸었지요, 오의원님. 잘 부탁드린다고.”


남자가 벼락 같이 고개를 들었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 꼴이 마치 생떼부리는 어린 아이 같다고 은호는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실장님! 일부러 실수한 게 아닙니다. 항구까지는 완벽했어요. 하지만 실장님도 아시다시피 그것이 보통 영악합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어디 이런 실수 하는 사람입니까? 아, 물론 실수를 하기는 했지요. 하지만 그 작은 것이 그런 수를 부릴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제 탓이 아니라, 그만큼 상황이 상황이었…”

“그러고 보니 이번에 당 대표에 선출이 되셨다구요. 축하드립니다. 이제 오의원님이 여당의 실세가 되셨으니 다음 수순은 대선이 아니겠습니까. 잘하면 오의원님이 아니라 이제 각하라고 부를 날도 오겠어요.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그렇게 고생을 하셨는데, 하하.”

“……”

“누가 그 자리에 올려드렸는지를 잊으시면 곤란해요.”


정민이 웃었다. 주름 하나 잡혀 있지 않은 수트만큼 근사한 웃음결에도 남자는 좀처럼 따라 웃지 못 했다. 남자가 기어이 코트의 잔디에 머리를 박으며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남자가 목청을 떨며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정민이 남자의 앞에 웅크렸다. 그리고는 남자의 머리칼을 움켜잡으며 벼락 같이 들어 올렸다. 달아날 곳을 잃은 남자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었다. 다시 한 번 정민이 물었다. 그래서요.


“질문에 대답만 하십시오. 놓쳤습니까, 안 놓쳤습니까.”

“……”

“답이 없다는 것은 실수를 인정한다는 뜻이군요.”

“으, 은호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남자가 불현듯 은호의 발 앞에 납작 엎드렸다. 살집이 오른 남자의 너른 체구가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은호의 얼굴에는 어떤 감흥도, 표정도 없었다. 남자가 끝내 눈물을 보였다. 추하다. 제 발에 매달려 애원하는 중년의 사내를 보며 은호는 그렇게 가볍게 소회했다. 그뿐이었다. 정민이 쓰고 있던 안경 끝을 잠자코 밀어 올렸다. 후 숨을 가다듬으며 정민은 말했다. 이번엔 남자를 향한 말은 아니었다.


“들을 가치가 없습니다, 도련님.”

“아니, 가치가 없다뇨… 그럴리가요… 은호님,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그러니까, 제가… 아시잖습니까? 제가 여태까지 은호님과 사모님을 위해서 얼마나 물심양면!… 제발… 바라는 거 없습니다. 대선, 그런 건 꿈도 꾸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안 됩니다. 예? 제발, 은호님 한 번만… 아버지다 생각하시고, 제발…”

“이젠 별 소리를 다하는군요. 도련님, 제가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아니! 실장님! 안됩니다! 제발! 안… 아아악!”


남자의 비명이 하늘을 갈랐다. 손을 짓밟고 있던 정민의 구둣발 탓이었다. 은호에게서 남자를 잠자코 떼어놓으며 정민은 지긋이 남자의 손등을 짓밟았다. 남자가 성대를 울리며 비명을 질렀다. 어차피 들을 사람은 없다. 의원과 동행했던 수행원은 지하 주차장에서 자신의 상관을 기다리며 일정을 체크하거나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이곳은 사사로운 라운지다. 정리를 돕는 하청업체 직원들만 아침 6시에 잠시 한시적으로 출입이 가능할 뿐 그 외에는 그 누구도 적법한 절차 없이 이곳에 올 수 없었다. 대부분 남자처럼 필요와 목적에 의해 초대를 받았고, 그마저도 안에 들어와 누군가 잠금을 걸려버리면 바깥에서 패스조차 먹지 않는 완벽한 밀실이 되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남자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마지막 발악 같은 거겠지. 은호는 잠자코 생각했다.

정민은 한참 후에야 발을 떼어냈다. 옅게 살갗이 비칠 정도로 껍질이 벗겨진 남자의 손등에서 붉은 피가 방울져 뚝뚝 흘러내렸다. 손을 움켜잡으며 남자는 다시 은호를 쳐다보았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세요… 정민이 남자의 얼굴을 걷어찼다. 훌쩍 넘어간 남자의 호흡을 따라 붉은 피가 코트에 좌악 흩뿌려졌다. 퍽퍽 울리는 탁음을 따라 남자가 꺽꺽 울며 목숨을 구걸했다. 시끄러워. 은호는 생각했다.

슬슬 지겹다. 생각을 삼키며 은호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남자의 턱을 퍽 차올리고, 숨을 가다듬으며 정민이 은호를 돌아보았다. 도련님. 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준수한, 허나 웃는 법을 오래 전에 잊어버린 것처럼 차가운 얼굴을 향해 정민이 재차 청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

“직접 손을 더럽히실 필요는 없으실 텐데요.”

“아니.”


정말 시끄러워서. 낮게 말을 삼키며 은호는 남자를 향해 자세를 낮췄다. 정민도 더는 나서지 않았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이 크게 열렸다. 비명도, 호흡도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목이라도 조이고 있는 듯 했다. 소리를 삭제 당한 것 같았다. 대신 남자는 소리 없이 울었다. 제발. 입술을 달싹이며 남자는 마지막으로 간청했다. 은호는 대답 대신 남자의 턱 끝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남자의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툭 코피가 터졌다. 하지만 남자는 손 끝 하나 까딱하지 못 했다. 은호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붉은 눈을 그대로 후벼낼 듯 뚫어보는 눈동자의 색에 일순 황금빛이 떠올랐다. 달처럼 노란 눈동자가 남자를 뚫을 듯 쳐다보았다. 그 채로 은호는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말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남자의 몸이 풀썩 넘어갔다. 커다랗게 열린 동공은 이미 빛을 잃었다. 정민이 구두 끝으로 남자의 머리를 툭 쳤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민이 온화하게 웃으며 은호에게 말했다. 죽었습니다. 답 없이 은호는 훌쩍 몸을 돌렸다. 얼음이 절반 정도 녹은 언더록의 위스키를 한 번에 털어넣고, 은호는 다시 바의 캐비닛을 열었다. 다시 연거푸 술을 채우는 은호의 곁에 다가온 정민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유난히 인상이 좋은 얼굴은 그때에도 서글서글 웃고 있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은호가 잔을 털며 짧게 대꾸했다. 적당히.

“그럼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적당히.”


은호는 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정민은 확실하게 처리해줄 것이다. 정민은 남자의 시신을 의원 사무실이나 자주 가는 골프 클럽에 던져둘 테고, 오래지 않아 시신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다. 부검을 해봐야 심장마비다. 이 나이대엔 급성심장마비가 그리 귀한 것은 아니다. 남자는 아직도 비공식적인 자리에선 줄담배를 피웠고 술을 즐겨 마셨다. 간과 폐의 상태를 살펴본 부검의는 적당한 요인을 의원실에 고지해줄 것이고, 사람들은 죽을 만 했었노라고 소회할 것이다.

간단한 일이지. 생각하며 은호는 남은 술을 마저 삼켰다. 식도가 타는 듯이 뜨거워지며 현기증이 지끈 밀려왔다. 급하게 들이킨 술 탓이다. 정민이 걱정스럽게 은호를 쳐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은호가 느리게 손을 휘저었다.

“괜찮아요.”

“오늘은 일찍부터 과음하시는 것 같습니다. 술을 잘 못하시는 체질이셨을 텐데요.”

“둬요.”

“……”

“두라고.”


그뿐이었다. 짧게 잘라낸 말에 정민은 더는 만류하지 않았다. 열이 오른 이마가 홧홧했다. 어지럽다. 그러나 마음에 걸려있는 부담만큼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찾아야해. 생각을 삼키며 은호는 열이 앉은 머리칼을 크게 쓸어 넘겼다. 준수한 생김처럼 단정하고 색이 짙은 흑발머리칼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짧게 울린 진동은 이내 끊어졌다.

메시지인가. 생각하며 은호는 별 감흥 없이 주머니에 꽂혀 있던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액정에 박힌 문자가 간결하게 끔벅거렸다. 수식도, 애칭도 없는 이름 석자였다. 지효경.

야 주으노

이찬 새끼가 점심 산대

올거지?

우리 완전 비싼 거 먹자 (이모티콘)


메시지는 첫 문장부터 주인을 쏙 빼다 박았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은호는 짧게 픽 웃었다. 그러다 도련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다시 눈을 들었다. 정민을 돌아볼 때 은호의 얼굴에는 이미 웃음이 없었다. 정민이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얼굴만큼 온화하고 공손한 말씨였다.

“일을 깔끔하게 매조지 하지 못해 좀 번거로워졌습니다. 그래도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인천까지 배편으로 오다 도킹 중에 달아났다고 했으니 해봐야 수도권 근방이겠죠.”


은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낮은 저음에는 어떤 억양도 없었다.


“녀석은 호족입니다. ‘순혈’ 호족.”

“하지만 줄곧 ‘새끼’였죠. 능력 한 번 발휘해본 적이 없는 순혈의 힘이 그렇게 대단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맘을 먹으면 천리 길을 한 걸음에 내달리는 것이 호족이고 순혈입니다. 인천에서 달아날 때도 ‘울었다’고 들었습니다. 새끼여도 얕게 볼 녀석이 아니구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

“호율이를 가르친 건 당신이니까.”


정민이 답 없이 웃었다. 그린 듯 눈 끝을 휘어트려도 눈동자 안에는 웃음이 없다. 이 자는 그런 자다. 소회를 짓씹으며 은호는 정민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한실장님. 부른 말에 정민이 공손히 대답했다. 예. 정민이 다시 운을 뗐다. 입술새를 비집고 튀어나간 목소리는 유독 낮았다. 마치 때를 기다리는 맹수의 울음처럼.

바람이 불었다.


“찾아요. 그리고 죽이십시오.”


높고 높은 바람이었다. 하늘을 흔들만큼 거칠고 세찬 바람. 세상을 모두 찢을, 하늘을 가를 그런 바람. 하늘을 죽일, 하늘을 태울 그런 바람.


“…‘숨’ 쉴 새도 없이.”


2010년 6월 26일 토요일 아침, 종로였다.












창밖이 요란했다. 일찍부터 요란하게 울기 시작한 매미 탓이었다. 하지만 호율이 쳐다보고 있던 것은 다른 소리였다. 맴맴 울었다. 매미가 아니라 지효경이.

“알았지? 아무 것도, 어떤 것도 함부로 건드리지마. 혼난다?”


진짜 매미 같다. 호율은 생각했다. 어쩌면 저렇게 지치지도 않고 잔소리를 하지. 약속이 있다면서 효경이 준비를 시작한 게 지금부터 꼭 1시간 전의 일이었다. 씻는 데에도 한오백년이더니 나와서 옷장을 한참 뒤진 후에야 효경은 겨우 채비를 끝마쳤다. 그래놓고도 현관 앞에 서서 이것저것 당부 말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스렌지 건드리지 마라, 냉장고 함부로 열지마라, 테이블 위에 올라가면 안 된다, 전기 코드 만지지 마라, 뭐 먹을 땐 손으로 먹지 마라 등등. 이제는 말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도 지칠 지경이었다. 우리 유모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 효경이 득달 같이 소리를 높였다. 왜 대답이 없어!? 호율이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끝내 짜증이 터졌다. 이제 갓 성호가 된 어린 호랑이는 이런 잔소리에 영 내성이 없었다.

“아, 나도 안다구요. 내가 하늘에서 갑자기 똑 떨어졌나? 이 집에서 석달동안 살았잖아요.”

“멍청아. 보던 거랑 직접 하는 거랑 같아?”

“대충 되겠죠, 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효경이 도끼눈을 홱 치떴다. 저 눈꼬리는 성내면 왜 저렇게 사나운가 모르겠다. 가만있으면 참 예쁜데. 생각을 삼키면서 호율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대답을 듣고도 효경은 한참 더 호율을 흘겨봤다. 아무래도 통 믿음이 가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저러고 외출을 할 수는 있을까 모르겠다. 약속 있다던 사람이.

그래도 잔소리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약속 덕분이었다. 현관문 손잡이를 꽉 움켜잡는 동작이 이번에야말로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문을 슥 밀다 효경은 다시 한 번 호율을 쳐다보았다. 효경의 침대 위에 앉아 있던 황금색 눈동자가 둥그렇게 열렸다. 또 왜요? 효경이 재차 같은 말을 강조했다.


“너, 진짜, 아무 거나 막 만지지마. 아니, 아무 것도 만지지마. 알겠어?”

“왜요. 망사팬티 숨긴 데도 다 아는데.”

“야!”


이거 진짜 스토커 아냐? 효경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동시에 얼굴이 시뻘겋게 익었다. 망사팬티가 무엇이었나. 효경에게 망사 팬티란 성년의 날에 대한 기억이며 흑역사였다. 성년의 날이라고 모텔이 성업이라는데 나는 대체 왜 남자 새끼들한테 저딴 걸 선물 받았을까. 나름대로 성년이라고 챙겨준다던 게 사내새끼, 것도 하필이면 저랑 만날 붙어 다니는 그 두 놈 뿐이었던 것이 효경의 가장 큰 실수였다. 점심을 먹으러 가던 길에 학교 앞 꽃집에서 장미 한 송이를 슥 뽑아다 선물했던 건 주은호였고, 저 문제의 망사팬티는 이찬이 선물했다.

우리 애기, 오늘 오빠랑 영화 볼 때 이거 꼭 입고 와야돼? 라던 말과 함께 이찬이 내밀었던 선물 상자는 검은 레이스로 포장된 케이스부터 엄청난 비주얼을 자랑했었다. 이 안에 속옷이 들어 있다고 전신으로 내뿜고 있었던 케이스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해이찬 얼굴에다 냅다 갈겨서. 그래놓고도 해이찬은 좋다고 낄낄 웃었었다. 하여튼 매저 같은 새끼.

그래도 성년의 날을 제대로 챙기기는 했다. 장미랑 속옷도 받았으니까, 씨발. 회상하니 또 울컥 열이 치밀어서 효경은 애꿎은 제 입술만 힘껏 깨물었다. 가야지. 가서 인사 대신 해이찬 뒤통수나 힘껏 후려 갈겨줄까. 불퉁거리며 효경은 현관 쪽을 향해 다시 훌쩍 돌아서다, 이내 우뚝 멈췄다. 동시에 온 얼굴이 시뻘겋게 익었다. 생각났다.

효경은 그때, 그 해괴망측한 속옷을 딱 한 번 입어봤었다. 저 야옹이의 눈앞에서.


“……”


긴 눈꼬리가 스르륵 호율을 향해 돌아갔다. 황금색 눈동자가 둥그렇게 열렸다. 여전히 현실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 그림처럼 씨익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엉덩이 진짜 예쁘더라.”

“……”

“한 번만 더 입어주면 안돼요?”


운동화 한 짝이 침대를 향해 날았다. 호율이 제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잡으며 엄살을 부렸다. 아, 아프잖아요! 효경이 대답 없이 현관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다다닥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소리가 온통 급했다. 그 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즈음에야 호율은 픕 웃음을 터뜨렸다. 그 채로 호율은 배를 잡고 웃었다. 마른 몸이 훌쩍 침대 위로 넘어갔다. 어깨까지 떨어지는 긴 색 밝은 머리칼이 펄럭 날았다. 웃음을 삼키며, 호율은 코끝을 슥 문질렀다. 황금색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 진짜.

“귀여워.”


지난 석달동안 질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어제부터 오늘이 몇 갑절은 더 재미있었다. 오래 걸리려나. 효경의 침대 위에서 풀썩 구르면서 호율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지금이 12시쯤이고 점심 먹으러 간다고 했으니까… 서너 시간은 걸리겠지. 그래도 일찍 오면 좋겠다. 나 심심하니까. 생각하면서 호율은 주섬주섬 협탁 위로 손을 뻗어 리모컨을 찾았다. TV의 채널을 영화 프로에 맞춰놓고 호율은 침대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싱크대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스팸을 저 위 어디에 뒀던 것 같은데. 망설임도 없이 찬장을 열자 역시나 찾던 것은 거기에 있었다. 황금색 눈이 아이처럼 반짝거렸다. 대충 손을 헤집자 차곡차곡 열을 맞춰 정리된 스팸의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스팸 캔 몇 개와 포크를 대충 집어 들고 호율은 다시 침대 위로 돌아왔다. 정리정돈은 물론 하지 않았다. TV에서는 지효경이 즐겨보던 시리즈 외화 드라마가 한참이었다. 오, 이거 재미있던데. 소회하며 호율은 캔을 땄다. 지효경은 그렇게 말했었다. 절대, 아무 것도 건드리지 말라고.

스팸을 헤집던 노란 눈이 씨익 웃었다. 바보 지효경.

“그러니까 나는 야옹이가 아니라니깐.”


스팸은 오늘도 맛있었다. 스팸을 만든 인간이 자자손손 복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호율은 생각했다.




* * *


언덕길을 달음박질할 때부터 효경의 마음은 급했다. 늦으면 해이찬이 또 두고두고 갈굴 텐데. 왜 나는 그 망할 야옹이 장단에 놀아나서. 버스에 급하게 뛰어 올랐을 때부터 핸드폰에서는 이미 메시지 알람이 뻐꾸기처럼 울리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왜 그렇게 기가 막히도록 차까지 막히는지. 이상하게 전보다 신호가 길어진 신촌 로터리에서 근 30여분을 허비하는 사이에 약속시간은 지났다. 동교동에서 버스 문이 열린 것과 동시에 효경은 쏜살 같이 내달렸다. 어릴 적부터 달리기 하나는 자신 있었다. 그래도 약속 장소인 해산물 뷔페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약속했던 시간보다 1시간이 훌쩍 지나있던 참이었다. 저 안쪽에서 낯익은 얼굴 둘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급한 숨을 고르며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이찬은 픽 웃으며 한 마디를 했다. 익숙한 인사였다.

“지효경씨는 또 지각이네. 하루라도 안 늦으면 못 참겠지?”

“왜 또 보자마자 시비야? 일 있어서 늦을 수도 있잖아.”

“애기야, 나는 여자도 이만큼씩은 안 기다리거든.”


애기는 무슨. 효경은 괜히 불퉁거리며 비어있던 은호의 옆자리로 빙 돌았다. 엉거주춤 앉으려고 하던 찰나에 은호가 슥 의자를 빼줬다. 얘는 또 왜 이래. 생각하며 효경은 슬며시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끝에는 이미 빈 접시가 더러 쌓여 있었다. 1시간도 넘게 기다렸을 테니 이찬도 은호도 배는 대략 채운 모양이었다. 생각에 효경의 눈길이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졌다. 어쩐지 미안해진 탓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말이 없는 주은호도, 놀리던 해이찬도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너 아침에 누구랑 있었냐?”


효경이 접시를 채우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이찬은 가장 먼저 그렇게 물었다. 물어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걸 막바로 또 바로 던져왔다. 그 탓에 효경은 적잖이 당황했다. 대비를 할 틈도 없었다. 접시에 쌓인 롤부터 집어 먹으면서 효경은 대충 대답을 흐렸다. 아, 뭐.


“누구랑 있긴 누구랑 있어.”

“아닌데. 지효경 분명히 누구랑 같이 있었는데. …여자지. 여자 맞지? 야, 어떻게 그러냐. 지효경이 이 오빠를 두고 연애를 하네?”

“야, 이 미친… 아냐.”

“아니긴. 모르냐? 이 오빠한테 지효경 촉 있는 거.”

“아니라고 했지, 내가. 여자는 무슨. 내가 너냐? 여자 없으면 환장하게?”

“그럼 뭔데. 남자? 헐, 대박. 남자 생겼냐, 너?!”

“아, 아니라고! 이 거지 같은 새끼야!”


갈수록 가관, 점입가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다. 꽥 데시벨이 올라가기가 무섭게 이찬은 자연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냐? 아님 말고. 그래놓곤 저 할말 다 끝났다고 주스만 후르륵 들이마셨다. 저걸 진짜 한 대 칠 수도 없고. 효경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후 가다듬었다. 나는 왜 하필 좋아해도 이딴 걸 좋아하는 거지. 짜증이 산발적으로 치밀었다. 차마 이런 공공장소에서 저 얼굴을 냅다 갈길 수도 없어서 효경은 애꿎은 포크로 잘 말린 롤만 힘껏 헤집었다. 그 모습을 이찬이 한참 말없이 봤다. 그러더니 스윽 얼굴을 들이밀며 장난처럼 말을 던졌다.

“우리 애기는 누구랑 아침부터 그렇게 격하게 놀았을까. 오빠 전화도 늦게 받고.”


또 그 얘기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한지 모르겠다. 이 새끼가 정말 포크에 찍히고 싶나. 포크를 거꾸로 틀어쥐는대신 효경은 힘껏 눈썹을 홱 치떴다. 이건 입만 열면 애기래.


“누가 니 애기야? 내가 니 애냐? 그 소리 좀 하지 말랬지, 내가.”

“귀여워서 그러잖니, 지효경아. 안 귀여운데 애기라고 하냐? 성질 좀만 죽이면 더 귀여울 텐데, 우리 애기.”

“야.”

“맞다. 주은호, 너 그거 아냐? 지효경 이거 잘 때 지 입술을 질근질근한다니까. 뭔 애가 젖꼭지 찾는 것처럼.”

“아, 또 그런 얘긴 왜 하는데!”


암만 짜증을 내도 좋다고 웃었다. 저건 진짜 사람 놀리는 게 재미있나. 안 그래도 더위를 뚫고 뛰어온 통에 짜증스러워 죽겠건만 저건 아예 기름을 붓다 못해 송유관을 꽂고 있었다. 그게 하필 해이찬이다. 그게 하필 너야. 내가 좋아하는 너라고. 영원히 닿을 수도 없겠고 이뤄지니마니 할 사이도 아니다. 그래도 바랄 수는 있는 거잖아. 조금만 더 잘해달라고, 조금만 더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달라고 마음으로 빌 수는 있는 거잖아.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말이 정말로 딱이었다. 어차피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어. 그런데도 몇 갑절로 속이 상하고, 몇 갑절로 마음이 찢어졌다. 하필 내가 좋아하는 게 너라서.

내가 접어야지. 탁자에 놓여있던 냉수를 냅다 들이키며 효경은 거듭 생각했다. 내가 언젠가 접고 말 거야, 개자식아.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이찬은 여전히 속없이 웃고 있었다. 야, 미안, 고만 놀릴게, 어? 삐쳤냐? 옆구리까지 쿡쿡 찔러가며 달래는 걸 효경은 잠자코 무시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오른편으로 굴러갔다. 눈이 마주친 후에야 효경은 주은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카맣고 깊은 눈동자가 효경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눈길을 먼저 피한 건 효경이었다. 얘는 또 왜 이래. 어물어물 시선을 떨어뜨리는 중에도 은호는 여전했다. 오른뺨이 어쩐지 뜨거웠다.

생각해보면 종종 이랬었다. 항상 저를 놀리고 장난을 거는 이찬과 달리 은호는 셋이 있어도 언제나 조용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셋이서 자주 어울리게 됐지만 효경 스스로 생각해봐도 이 조합은 이상했다. 엄밀히 말해 은호가 저와 해이찬의 곁에 있다는 데에서 효경은 가끔 위화감을 느꼈다. 주은호는 해이찬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찬과 왁왁 소리를 높여 어울리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꼭 시선이 느껴졌다. 의아한 기분에 고개를 돌려보면 언제나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그냥 은호를 돌아보면 늘 시선이 마주치고는 했다. 늘 그뿐이었다. 은호는 늘 둘을 보고 있다. 둘의 대화에는 적극적으로 끼어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체 왜 이렇게 셋이 붙어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왜 자꾸 사람을 그렇게 쳐다만 봐? 언젠가 한 번은 그렇게 대놓고 물었었다. 효경은 그런 성격이었다. 불편한 부분에 대해서는 참거나 덮어두질 못 했고, 돌려 말하는 것보단 직구를 던져서 해결을 봐야 성미가 풀렸다. 그게 아마 작년 이맘 때였나. 그때에도 은호는 눈망울이 크고 깊은 눈을 끔벅거리면서 효경에게 담담히 대답했다. 그냥.


눈이 가서.

그뿐이었다. 싱거운 녀석이라고 효경은 생각했고, 누가 누굴 일방적으로 쳐다본다고 해서 틀어질 관계는 이미 아니었다. 해이찬에 비해 은호는 조용한 성격이었고, 효경은 어쩐지 그 성격이 편했다. 게다가 나름 연민도 있었다. 입학 당시부터 K대 남신이라는 부담스러운 타이틀을 달아버린 주은호에게 선뜻 다가가 말을 거는 녀석은 학내에 좀체 없었다. 벼랑 위의 꽃이라는 말이 딱이었다. 은호는 늘 혼자였다. 효경과 처음 만났을 때에도 은호는 혼자 동아리실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효경이 은호에게 말을 걸게 되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 해를 자주 어울렸다. 둘만 남으면 여전히 조금은 어색했지만 효경은 은호가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좀 달라졌다. 껄끄러웠다. 아니, 그보다는 좀… 이상했다. 은호의 시선이 전처럼 편하지가 않다. 이상하게 자꾸만 날카롭고 예민해진다. 그리고 어쩐지 귀가 홧홧해졌다. 그 이유를 효경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식사는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뛰어온 탓에 효경이 입맛을 잃은 탓이 컸다. 두 접시를 비우고 포크를 놓을까말까 망설이던 타이밍에 이찬이 국그릇 가득 요거트를 담아 들고 왔다. 숟가락 세 개를 나눠들고 셋은 한참동안 요거트를 푹푹 퍼먹었다. 그리고 일상적인 얘기들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별 의미는 없는 대화였다. 이야기의 주제는 이찬이 쥐었고, 예상대로 어제의 소개팅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예쁘더라. 이찬은 먼저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장황해질 설의 포문을 열었다. 예뻐봐야 그게 그거라며 효경은 괜한 타박을 했던가. 이찬이 또 득달 같이 반기를 들었다. 아니, 진짜 이쁘다고, 티파니 닮았다니까? 그래놓곤 한참동안 그 여자애와 나눈 첫 추억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줄줄 이어졌다. 분위기 좋았다, 밥도 맛있었다, 커피 대신 영화를 보자고 걔가 그러더라, 근데 먼저 손을 잡아오더라니깐? 그 대목에서 이찬은 눈썹까지 모아가며 액션을 크게 했다. 그 입이 너무 미워서 한 대 쳐주고 싶은 마음을 효경은 잠자코 참아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상처 주는 말만 귀신 같이 골라내던 해이찬은 이와 같은 말로 소개팅에 대한 회고를 담담히 마무리했다. 그래서 사귀기로 했어.

“오빠 연애해서 어떡하지, 효경아. 우리 애기랑 놀아줘야 하는데.”


농담처럼 돌아온 말에 효경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속이 상해 그랬다. 그것보다는 혀 끝에 가시가 박힌 것 같아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답 대신 효경은 차가운 요거트를 일부러 천천히 녹여가며 먹었다. 느릿느릿 녹아드는 요거트는 참 달았다. 말이라는 것도 이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 저 무심한 말들을 혀끝에 얹어서 모두 살살 녹여버리고만 싶었다. 한참 혀끝으로 굴리고 있다보면 언젠가는 저 눈치없는 맘도 녹지 않을까.

하지만 될 리가 없어. 난 영원히 말하지 않을 거니까. 생각하니 어쩐지 눈가가 시큰했다. 코를 훌쩍 들이켰을 때 해이찬이 눈을 크게 열었다. 감기 걸렸어? 약 사줄까? 요거트가 너무 차가워서 그렇다고, 효경은 대답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찬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약속대로 계산은 이찬이 했다. 자리로 다가온 종업원에게 해인찬은 체크카드와 함께 제휴 할인이 된다는 멤버십 카드를 내밀었고, 종업원은 건조한 얼굴로 본인 확인을 위한 신분증을 달라고 요구했다. 해이찬이 지갑을 다시 뒤적거렸다. 지갑에서 튀어나온 학생증 사진을 보자마자 코를 킁 풀고 있던 효경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학생증 속에서는 갓 입학한 것이 분명한 해이찬이 잔뜩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머리부터 답이 없었다. 효경이 눈 끝을 찍어가며 이찬을 놀려댔다. 이 머리는 뭐야, 잔디야? 화분에 심어? 물주면 자라? 뭔가 싶어 슬쩍 넌지시 건너보던 은호까지 입을 틀어막고 풉 웃어버리자 이찬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야, 이 정겨운 새끼들이.

“작년에 찍은 거라고. 야, 니들은 안 촌스러울 줄 아냐?”

“아니… 해이찬 진짜, 용됐구나. 아, 너무 웃겨.”

“어허, 우리 애기. 오빠 놀리면 못쓴다. 야, 이땐 다 그랬다니깐. 너는. 니 사진 좀 보자.”

“난 학생증 안 가지고 다니거든, 바보야.”

“아이구, 자랑이다. 그럼 주은호. 야. 너 지갑 꺼내봐.”


효경을 겨누던 화살이 느닷없이 은호를 향해 날아갔다. 불똥이 왜 또 그리로 튀어? 효경의 말에도 이찬은 막무가내였다. 자기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장엄한 선언에 은호가 주섬주섬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구찌의 로고가 깔끔하게 박힌 지갑은 꼭 저처럼 단정한 블랙이었다. 이찬과 효경이 동시에 입을 떡 벌렸다. 하여간 누가 부잣집 아들 아니랄까봐. 하지만 감상을 입 밖으로 낼 새도 없이 이찬이 부리나케 지갑을 열었다. 지갑 속에서 튀어나온 건 학생증이 아니었다. 민증이었다.

대학교 학생증과 민증은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다. 학생증이 끔찍하다한들 민증만 할 것인가. 아무 것도 몰랐을 좆고딩 시절에 힘주고 찍은 민증은 대부분 지갑에서 꺼내놓기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이 사람은 주은호였다. K대 남신이라는 바로 그 주은호.

“헐, 대박.”

“와, 민증 주제에 존나 우월해.”

“해이찬이 아니라 주은호니까.”

“하하, 우리 애기… 오빠한테 맞아볼래? 입술로.”

“꺼져, 미친 놈아.”


민증 속 주은호는 지금보다 앳됐다. 지금보다 촌스러웠고, 심지어 귀두머리였다. 그런데도 잘 생겼다. 그냥 흰 티셔츠 하나 입었을 뿐인데도 민증에서 빛이 났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생겼지? 효경이 민증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감탄하는동안에도 이찬은 내내 툴툴거렸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 이것까지 엄친아냐. 씨발, 신은 존나 죽었다며 니체까지 끌고 들어오는동안에도 은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쑥스러운 건지, 기쁜 건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저건 정말 돌이 아닐까. 생각하던 차에 효경의 눈이 일순 한 곳에 꽂혔다. 전혀 굴욕 없는 18세 주은호의 사진 때문은 아니었다. 이름 옆에 정갈하게 박혀 있던 한문 덕분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한 글자가 효경의 눈에 잡혔다.
호(昊)였다.


“하늘 호.”


이건 무슨 글자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보다 대답이 먼저 돌아왔다. 은호였다. 효경이 잠깐 신기한 듯 은호를 돌아봤다, 다시 글자로 눈을 돌렸다. 뭔데? 해이찬이 고개를 들이밀며 끼어들었다. 효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 탓이었다.

하늘 호.

그 글자를 어딘가에서 분명히 봤었다.




(5편에서)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랜만에 봤다가 생각이 나서 스르륵 이어봅니다. 2년만에 이어두는 4편이라니, 2년만에 쓰는 글이라니....  지금부터는 부지런히 좀 써보겠습니다/


+ 다시 쓰니 1편부터 3편을 다 뜯어고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래도 우선은 그냥 둡니다. 2년간의 격차가 있음을 감안하고 봐주시옵소서 ㅠ////ㅠ

글을 씁니다. | 트위터 @ruka_tea

루카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댓글을 사용하지 않는 블로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