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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Double Negative Agent)

#TeaserTXT

* 짤막짤막하게 썼던 티져 텍스트들을 모아서.

* 이런 녀석들이 나오는 가진 1차 BL입니다.




# 1

앞머리에 살짝 덮여 있던 커다란 에메랄드 색 눈이 고요히 움직였다. 여전한 얼굴이었다. 좀처럼 환히 웃는 법도 모르는 색 깊은 초록 눈 위로 촘촘하게 덮인 긴 속눈썹이 느리게 끔벅였다. 그때마다 왼쪽 눈만 설핏 가리는 흑색 앞머리칼이 바람결에 춤처럼 흔들렸다. 여지없이 하얀 얼굴, 코카서스 혈통이라기엔 다소 선이 옅은 이목구비는 마치 그려둔 듯 했다. 빚은 듯 놓인 콧날 옆에 옅게 부푼 둥그런 볼에 딘은 잠깐 기가 막혔다. 젖살 빠질 시기는 애저녁에 지났건만 아직도 저놈의 볼살 봐라. 입술이라도 한 번 찍어 누르고 싶은 보얀 볼에 딘은 죄 없는 제 입술만 연거푸 짓이겼던가. 여기까지 보고 있는 동안에도 얇지만 색 고운 입술은 그때까지도 말 한 마디, 웃음 한 번 지어주지 않았다. 그마저도 여전했다. 그리고 딘은 이런 침묵 뒤에 녀석이, 아민 리 다이어가 어떤 소리를 뱉어내는지 이미 7년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뭐야.”


툭 터진 딘의 말투가 영 사나웠다. 그 얼굴에도 아민은 눈 끝 한 번 깜박하지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법도 없었다. 그저 여전한 얼굴로 딘의 갈색 눈을 가만히 들여 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찬찬히 입을 뗐다. 한참 만에 열린 것치곤 참으로 정 없는 말투였다.


“별 거 아냐.”

“지랄하고 자빠졌다. 니가 나한테 찔러 대서 별 거 아닌 일도 있냐? 한참 좋을 때 찾아와서 씨발 산통은 다 깨놓고.”

“산통 깬 적 없는데.”

“오자마자 여자들 쫓아낸 게 누구였더라.”

“지들이 간 거잖아.”

“야, 그럼 초면에 얼굴 처음 보는 웬 남자새끼가 오자마자 못 생겼다는데 기분 좋게 즐길 여자가 세상에 있기는 하냐, 어!?”


지들이 간 거야. 연거푸 덧붙이는 말투만큼 표정도 덤덤했다. 그 얼굴에 속이 터지는 건 딘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말을 말자, 말을 말아. 차피 이런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딘은 훤히 드러나 있던 제 가슴판을 두어 번 퍽퍽 두드렸다. 침대는 여전히 엉망이었다. 그제야 트렁크 말곤 전부 벗어던진 상태라는 게 생각이 난 모양인지 딘은 괜히 침대 곁에 흩어진 제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대충 티셔츠를 걷어 올리고, 불없이 담배부터 무는 동안에도 아민은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다 뭉치고 헤집어진 시트 위에 앉아서 아민은 딘의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캠핑카의 침실이 유난히 좁은 탓에 딘은 정리를 하면서도 아민의 무릎을 피하느라 애를 먹었다. 최대한, 의식적으로 닿지 않으려 애쓰면서 딘은 티셔츠를 팔에 걸쳐들고 창문을 열었다. 그제야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딘은 다시 말을 걸었다. 아민은 그때에도 빤히 딘을 보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초록눈이 옅게 빛났다. 그 눈에 딘은 다시금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하여튼 여전히 사람 기가 딱 막히는 예쁜 눈이었다. 이런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리고 난 지금에도.


“이번엔 또 뭐냐.”

“별 거 아니라고 했잖아.”

“별 거 아닌 일 때문에 이 새벽에 텍사스 시골까지 쳐들어 오냐? 런던에서 하루만에 올 거리가 아닐 텐데? 야, 내가 너 예전에도 누차 말했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아무 때나 불쑥 찾아오는 이거 진짜 예의 없…”

“내가 런던에 있던 건 어떻게 알아?”


툭 끼어든 말에 딘은 잠시 말을 잃었다. 잘려나간 말꼬리는 채 줍지도 못했다. 런던에 있던 것만 알겠냐, 네가 어제 누굴 만나 무슨 일을 저지르고 영국을 뒤집어 놓고 왔는지 것도 다 알지. 런던 미술 경매에서 에곤 쉴레 그림 세 점이 사라졌다는 것도 알고. 거기까지 절대 말해주고 싶지 않아서 딘은 그저 말없이 물린 필터만 잘근 씹어댔다. 추적했다고는 입이 삐뚤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아, 뭐건. 대충 받은 말에 아민은 잠깐 딘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러다 이내 가볍게 화제를 되돌렸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여느 때처럼, 이번에도.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너 뻔뻔한 건 좆고딩 때부터 알았지만 이건 좀 아니지. 지금 나한테 부탁할 입장이냐? 신새벽에 찾아와서?”

“아침 7시야.”

“너 내가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는지 모르냐? 까먹었어? 다이어씨 큰일 났네. 너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니냐?”

“부탁이 있댔잖아.”

“그 망할 부탁, 내가 한 번만 더 들어주면 사람 새끼가 아니라 개새끼라고 말했을 텐데.”

“나 개 좋아해.”

“…그게 지금 칠 드립이냐, 씨발.”


아침부터 어이가 없으려니 별. 기가 막혀서 헛웃음만 퍽 터뜨리고 있는 중에도 아민은 여전히 어떤 리액션도, 표정 변화도 없었다. 벽을 보고 말하는 듯한 이 기분마저 오랜만이라 딘은 그저 웃었다. 그래, 애초에 너를 붙잡고 사람 소리를 기대하는 내가 병신이지. 자조하며 딘은 반절쯤 남은 담배를 마저 빨았다. 그러고 있으려니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디, 하고 불렀다. 1년만이었다.


“왜.”

“너, 여전하네.”

“뭐가.”

“여자 보는 눈 형편없는 거.”

“이제 뭔 상관인데, 니가.”

“몰라. 그냥,”

“……”

“그런 애들 만나지마.”

“왜.”

“못 생겼으니까.”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런 식이다. 레나의 지인들이라고. 이래 뵈도 요새 한참 잘나간다는 모델들인데 레나 알면 멱살 잡겠네. 생각하면서도 딘은 그 말들을 모두 속으로 삼켜넣었다. 딱히 부인할 말이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않냐고. 그 지랄을 다 당해놓고도 아직까지 저게 내 눈엔 제일 예쁜데.


“헤어진 사이에 오지랖 너무 쩌는 거 아니냐, 너. 내가 누굴 만나건 상관 안 하시다면서요, 다이어씨.”

“만나. 상관 안 해. 근데, 나보다 못 생긴 애 만나지마.”

“……”

“화나니까.”


말을 붙인 아민의 눈길이 가볍게 돌아갔다. 며칠 전에 새로 구입한 TV가 눈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전원이 꺼지지 않은 새카만 TV를 아민은 빤히 들여 봤다. 그 얼굴을 딘이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둘다 그 채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없이 이어진 침묵을 깬 건 아민이었다. 갈게. 짧게 떨어진 말에 딘이 또 한 번 갈색 눈을 크게 열었다, 이내 말았다. 아, 그래. 넌 이런 식이었지. 오랜만이라 다 잊을 뻔 했다. 하여튼 지 기분대로 지 꼴리는대로 해제끼고 용무 없다 싶으면 쿨하게 가버리는 이런 거. 아민이 미련도 없이 일어나 문을 여는 동안 딘은 한참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을 나가기 전에야 겨우 불러 세웠다. 에이, 하고 부른 소리에 막 문을 나서던 아민이 멈칫 했다. 그마저도 오랜만이었다. 디라는 애칭만큼이나.


“부탁.”

“……”

“부탁 있다면서.”

“있어.”

“근데 그냥 가냐.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어차피 며칠 뒤에 다시 보게 될 거니까. 오늘은 네 얼굴 보러 왔어.”

“…왜.”

“보고 싶어서.”


덤덤히 덧붙인 말에 숨이 막혔다. 이마저도 오랜만이었다. 덤덤히 가슴께를 찔러온 말에 딘은 저도 모르게 왈칵 눈살을 구겼다. 하마터면 팔이라도 낚아챌 뻔 했다. 그러나 아민은 단 한 번도 딘을 돌아보지 않았다. 가볍게 문을 넘어가는 걸음이 자연스러웠다. 인사도 없이 캠핑카의 스틸 계단을 밟아나가는 등을 딘은 잡지 못했다. 따박따박 계단을 내려간 흑발 머리카락과 새하얀 목덜미는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바깥에서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차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아직도 람보르기니 모나. 생긴 것과는 다르게 꽤 화려하며 거친 운전 취향을 생각하며 딘은 가볍게 웃었던가. 그러다 뒤늦게 뭔가가 떠올랐다. 허겁지겁 열린 문으로 달려간 딘이 코앞의 붉은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를 향해 꽥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잠깐, 야, 며칠 뒤에 다시 보게 될 거라니, 너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

“에이, 야, 아민 다이어! 아민!! 야!!!!!”


부웅 하는 발진음과 함께 흙먼지가 부옇게 피어올랐다. 그 채로 대꾸 한 마디 없이 무르시엘라고는 텍사스 시골의 흙길을 따라 달려 나갔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무르시엘라고의 뒷모습을 딘은 그저 기가 막힌 듯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불길했다.



# 2

갈색 눈이 와작 구겨졌다. 또 화났나. 와작 구겨지는 눈살을 보며 아민은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빚어 낸 듯 오똑하고 높은 콧날을 사납게 찡그려가며, 이따금씩 속이 터지는지 갈색 머리칼을 커다란 손으로 헤집어 가면서 녀석은, 드미트리 안넨코프는, 즉 딘은 아민에게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씨발아, 하고 터진 소리에도 아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구겨진 미간만 빤히 들여 보았다. 미간도 참 잘 생겼다. 특히 지금처럼 이렇게 화낼 때엔.

“진짜 사람 가지고 이러는 거 아니지. 내가 너란 새끼한테 속아준 횟수 꼽다가 씨발 손발이 모자랄 지경인데… 들어? 듣냐고! 안 듣지? 존나 너 일부러 이러냐, 지금?!

“어.”

“이게 진짜 씨발년 소리 한 번 들어줘야 성이 풀리지, 어.”

“일부러 이러는 건데.”

“야.”

“너 화내면 섹시하잖아.”


그 소리에 딘이 말을 잃었다.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성질머리에 거칠게 풀어헤쳤던 제 넥타이를 손에 잡아 쥔 채로 딘은 아민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뭐라고요, 이 씨발?


“너 진짜 오늘 죽고 싶냐. 사람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뭐?”

“진짠데.”

“야.”

“미간이 잘 생겼잖아.”

“야.”

“구기면 더 잘 생겼어.”

“야, 너 진ㅉ…”


넥타이를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싶었던 타이밍이었던가. 아민이 드물게, 눈을 얕게 구기는가 싶더니만 이내 양손이 딘을 향해 훅 뻗어갔다. 길고 가느다란 하얀 손가락들이 딘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순식간에 끌어 당겼다. 욕이라도 한 번 더 뱉어주려던 말이 사라진 것도 그 즈음이었다. 키스했다. 그 채로, 뜬금없이 멱살을 당기면서, 아민 다이어가 드미트리 안넨코프에게.

입을 악물 새도 없이 벌어져 있던 틈새로 혀가 느릿하게 틈입하며 아랫입술을 얕게 물었다. 쪽, 소리가 나게 물고 빨더니만 이내 각도를 틀어가며 가볍게 문지르고 키스했다. 결코 서둘지 않는, 그러나 교태처럼 나른하게 휘어 감기는 혀끝에 딘은 그저 기가 막혔다. 씨발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 미친 년은 대체 이런 키스는 어디에서 배워오는 거냐고. 키 차이 탓에 뒤꿈치를 들어 올리고 제게 매달린 채로 아민은 몇 번이고 얕은 키스를 이어갔다. 몇 번이나 쪽, 하고 츕, 하더니만 이내 입술이 멀어졌다. 그때 딘은 이미 멍했다. 얼떨떨한 듯 열린 갈색 눈을 보며 아민은 젖은 제 입술을 혀끝으로 가볍게 훑었다. 그 작은 제스쳐에 딘은 기어이 코웃음을 쳤다. 얼척이 없다는 듯.


“밤에 잠 좀 잘 잤나보다? 하여튼 안 쳐재워야 정신 차리지, 이 여우 같은 게.”

“어, 재우지마.”

“이것도 일부러 이러냐?”

“어.”

“왜.”

“너한테 꼴려서.”

“…씨발년이, 진짜 입 안 다물지.”


말을 하면서 딘은 기어이 아민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은 탓에 아민은 순식간에 딘의 품으로 끌려 들어갔다. 허리께에서 단숨에 내려간 양손이 엉덩이를 왈칵 움켜쥐었다. 주무르는 악력에 아민이 저도 모르게 얕게 눈을 구겼다. 그 눈에 딘이 낮게 웃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부딪쳤다. 몇 번 얕게 이어지던 키스는 각도를 바꿔가며 점점 깊어졌다. 호흡이 벅찰만큼 쉴 새 없이 키스하고 혀를 얽었다. 아민의 기다란 손끝이 딘의 셔츠를 헤집고, 딘이 급하게 아민의 수트 팬츠를 풀기 시작했다. 드레스룸 바깥에서 누군가 쾅쾅 문을 두드렸다. 켄이었다. 그럼에도 둘 중 누구도 입술을 떼어내지 않았다. 좁은 드레스룸에 들리는 거라곤 오로지 질척이는 젖은 숨소리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낮은 신음뿐이었다.


“딘, 아민. 멀었어? 블랑이 찾고 있단 말이다.”

“……”

“딘. 아민―”

“……”

“니들 설마… 하냐? 그거냐? 아니지? 야, 여기 우리 장모님 집이라고!”

“……”

“이것들이 진짜 돌았나. 야, 문 열어! 야!”


누군가 맞붙은 입새로 낮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도 이내 묻혀 사라졌다. 누군가의 숨결에, 어쩌면 다급하게 넘어가던 손길에 휩쓸려서, 파도처럼.




# 3

첫인상을 따지자면, 좋았다. 그 남자는 그랬을 것이다.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다. 짧은 적발 머리칼은 옅게 굽슬거리고, 이따금씩 빛에 따라 보라색으로 보여지기도 하는 짙은 청색 눈은 크고 둥글었다. 그 얼굴로 눈 끝을 접어가며 귀엽게 웃는 남자는 언제나, 100%의 확률로 실제 나이보다 서너 살은 어리게 보였다. 때문에 아민도 처음에 그를 보았을 때엔 동갑이라고 생각했다. 스물여덟이라던데. 남자의 정보를 털었던 건 이번에도 딘이었고, 딘은 그때에도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미 연방 수사국의 정보부에서 최근 가장 주목 받는 요원 중 하나라고 했다. 3년 전 FBI 연수생 시절부터 전 과목에서 유례없는 올 A를 기록한 남자는 단 한 번도 1등이 아닌 적이 없었다. 딘은 그 점도 싫어했다. 그러나 아민은 딱히 남자를 껄끄럽다거나 불편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따지자면 저쪽은 쫓는 입장이고, 이쪽은 쫓기는 입장인데도 그랬다. 그게 그, 그레고리 빈센트 맥케인이 가진 가장 큰 무기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그렉이라 부르는 듯 했다.

“아민군은 어떤 걸 마실래? 날이 더우니 소다가 나을까? 아니면 역시, 에일?”


전형적인 아일랜드계의 외모만큼 남자의 말투도 꼭 그랬다. 아이리시 억양이 얼핏 남아있는 말투에 아민은 답없이 잠깐 그렉을 쳐다보았다. 아민은 이 상황이 어딘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샌프란시스코 고속도로의 휴게소 레스토랑에 그렉과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이 상황도, 또 타이밍도 어딘지 수상쩍었다. 딘은 오늘 아침 블랑과 함께 알래스카로 떠났다. ‘흰 고양이 포획’이 마무리 된 것은 어제였고, 아민은 오늘 그 일의 ‘보수’를 찾으러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중이었다. 운전 중에 잠시 쉴까 하고 들른 레스토랑에서 그렉이 아는 체를 해온 것은 지금부터 꼭 30분 전의 일이었다. 마치 친구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렉은 손을 흔들며 자연스럽게 아민을 불렀다. 아민군, 이라고 정확하게 불린 이름에 아민은 흠칫 하며 그렉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었다. 따져 보면 그것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수사 당국에서 에일이 아닌 본명이 불려본 것도.

웨이트리스가 다가오자 그렉은 먼저 아민에게 음료를 권했다. 아민은 레몬소다를 골랐고, 그렉은 나초와 함께 진저에일을 주문했다. 시간은 오전 11시, 맥주를 먹기엔 다소 이른 시간이다. 의도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주문에 아민은 잠시 움찔했던가. 주문을 받은 웨이트리스가 떠나자 아민은 담배부터 피워 물었다. 예의상 한 대를 권해보자 그렉이 어깨를 으쓱했다. 금연중이라서.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을 받은 그렉은 아민의 담배곽에 찍힌 이름을 가볍게 소리 내어 읽었다. 럭키스트라이크.


“늘 같이 다니던 친구가 없네.”


하마터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할 뻔 했다. 그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뒤늦게 말의 뉘앙스를 알아차린 아민이 드물게 눈을 크게 열었다. 커다랗게 열린 에메랄드 색 눈을 들여 보며 그렉은 또 한 번 눈끝을 접어 웃었다. 여자들에게 꽤 인기 있을 듯한 얼굴이었다. 확실히 인상이 좋았다.

“항상 둘이라고 생각했는데 혼자 있는 모습을 보니 좀 어색한 걸.”

“그렇게 붙어 다니진 않아요.”

“가끔 치곤 좋지 않아? 사이.”

“전혀.”

“아, 실례 했나. 미안, 섹스만 하는 사이구나.”


어이가 없다거나 화를 낼 타이밍도 없었다. 이상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아니, 묘했다. 그 묘한 느낌의 출처를 알 수 없어서 아민은 그저 크게 뜬 눈을 느리게 끔벅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을 채 달싹일 틈도 없이 웨이트리스가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나왔다. 레몬소다와 진저에일, 나초를 내려놓은 웨이트리스는 짧은 치마를 팔랑거리며 총총 사라져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렉은 손으로 진저에일의 병마개를 열었다. 입고 있던 진네이비색 수트 위로 거품이 조금 튀었다. 그렉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가볍게 거품을 닦아냈다. 아민은 가만히 그렉을 지켜보았다. 수트는 에르메네질도 젠야, 시계는 르쿨트르, 커프스는 까르띠에. FBI에겐 어울리지 않는 가격이었다.


“확실히 FBI에게 어울리는 브랜드는 아니지, 이거.”

“……”

“내 옷을 보고 있었던 거 아냐?”


이조차도 자연스러웠다. 가볍게 틈입한 말에 소다잔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던 아민의 손끝이 흠칫 했다. 그렉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는 마개를 딴 진저에일을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켰다.


“잘 만든 에일은 오래 묵은 향이 있지. 보통 라거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좋아하지 않지만, 에일을 마시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에일만 찾게 되거든. 그런데 여긴 좀 유감. 역시 기성품은 맛이 없어.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이런 맛은 돈이 아까워. 구관이 명관이란 소리가 있는 것처럼 말야.”

“……”

“7년이 참, 길지?”


또다. 마구 흩어져 있던 카드 테이블에서 원하는 패만 집어 골라내는 것만 같다. 이 남자는 분명히 포커도 잘 하겠지. 포커 생각에 아민은 또 의식적으로 눈을 구겼다. 포커엔 재주가 없다. 포커라면 자신보다도 딘이다. 그 녀석은 발이 땅에 붙어 있다면 못하는 게 없으니까. 하고 있는 분야가 분야인 만큼, 딘은 포커판 전체의 흐름을 읽고 다음 수를 짚어내는 데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한 번도 지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이 남자와 붙으면 어떨까. 잠깐 그런 생각을 했던가. 그러나 생각은 이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 역시도 그렉 때문이었다.


“대단해. 어떻게 연애를 7년동안 할 수 있을까?”

“연애 아니에요.”

“아, 맞다. 또 실수. 섹파랬지.”

“신경 꺼요.”

“그렇게는 못하지. 너희를 감시하는 게 내 일인 걸. 어디에서 뭘 하고, 뭘 마시며 누굴 만나는지 그런 건 나에게 참 중요하거든. 언제 잠드는지, 어제는 누구 집에서 잤는지, 하루에 몇 번을 붙어먹는지, 키스할 때의 사소한 습관이나 잠자리 버릇 같은 것도 말야.”

“……”

“아민군은 게이?”


저기요. 이번엔 불쾌감을 참지 못한 아민이 한 마디 했다. 낮게 붙인 말에 그렉은 손사레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미안미안, 실례였지? 사람 좋은 웃음을 덧붙이고 그렉은 다시 진저제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채로 턱을 괴며 그렉은 느긋하게 말을 붙였다. 인상이 너무 좋았다. 분명 실례되는 말을 들었는데도 화가 나지 않을 만큼.


“내가 좀 그래. 원하는 게 있으면 궁금해지고, 궁금한 게 있으면 들여다봐야 하거든. 하나를 알면 둘을 알고 셋을 알고 싶어. 그럼 다음 수를 읽기도 좀 더 쉬워지지 않겠어? 이를 테면, 아민군이 지금부터 무엇을 할지 어디에 갈지 맞춰보는 거야. 어디 보자… 샌프란시스코에 가지? 아마 레나양을 만날 거야. 레나양은 아민군에게 정말로 고마웠다면서 ‘빛의 노래’를 주겠지. 저녁엔 알래스카에서 전화가 올 거야. 아민군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맞춘다면 상을 줄게, 디.’ 하지만 드미트리군은 정답을 맞추지 못할 거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민군이 하얗게 발가벗고 누워 ‘빛의 노래’만 입고 있다는 건 모르겠지.”

“……”

“스토커 같은가, 나?”

“네.”


짧게 떨어진 대답에 그렉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뭐가 재미있는 거지, 이 사람은. 생각에 아민은 저도 모르게 얕게 눈을 구겼다. 구겨진 초록색 눈을 그렉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짙푸른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웃었다. 믿고 싶은 눈이었다. 누구라도 믿을 수밖에 없을,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눈.

왜 그랬을까. 그 눈에 소름이 끼쳤던 건. 그 눈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등골이 서늘했던 이유는.

“예쁜 얼굴이네, 아민군.”

“……”

“울면 더 예쁘겠는걸.”

핸드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짧게 울리는 벨소리에 아민은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고, 그렉은 웃으며 받아, 하고 말했다. 핸드폰은 두 번 정도를 울리더니 이내 끊어졌다. 부재중 목록에는 어떤 번호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민은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이런 시간에 번호를 숨겨 전화할 녀석이라곤 이 세계에 오로지 단 한 사람 밖에 없으니까.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정도인 것처럼.

나중에 걸자. 급하면 또 하겠지. 가볍게 생각하고 아민은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다시 소다에 꽂힌 빨대를 집어 무는 모습을 그렉이 턱을 괸 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웃고 있었다. 눈 끝을 접어가며, 해사하게.


“알래스카는 참 넓지.”

“……”

“드미트리군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 말에 아민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떠밀린 의자가 나무바닥에 긁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심장이 뛰었다. 불길했다.



# 4

깊은 밤이었다. 상점들은 모두 일찌감치 문을 닫은 듯 했다. 점점이 놓인 가로등빛을 제외하고는 상점의 불빛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디모인의 시간은 다른 어떤 주보다 빨리 저문다고 누군가 그랬었던가. 그토록 고요한 아이오와주 디모인, 자정을 갓 넘긴 시간이었다.

공원의 한 모퉁이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게 드리워졌다. 불빛은 공원의 담벼락을 느리게 훑고 금세 멀어졌다. 얼핏 스친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공원의 어둠이 잠시 반짝였다 가라앉았다. 이미 문을 닫은 공원의 창살 안쪽, 화단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헤드라이트 빛에 걸린 어둠 속에 짧은 갈색 머리가 흔들렸다, 이내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빛마저 훌쩍 떠나버린 공원의 어둠 속에서 낮게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얀 팔이 다가와 짧은 갈색 머리의 목을 감은 것은 그 무렵이었다. 감겨온 늘씬한 팔에 갈색 머리가, 딘이 기가 찬 듯 얕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잔뜩 부벼댄 모양인지 딘의 아랫 입술이 슬쩍 부어 있었다.

"하여튼 간이 부었지, 너는. 이런 장소에서 꼴리기는 하냐?"


말을 붙이며 딘은 제 허리 아래, 창살과 바짝 붙은 벤치 위에 가로 누워 있던 진초록색 눈가에 키스했다. 아랫입술에 한 번, 볼에 한 번. 그러다 천천히 미끄러진 입술이 귓불을 잘근 거렸다. 볼만큼이나 하얗고 말랑거리는 귓불을 한참 잘근대다 느닷없이 이를 세웠다. 그 아픔에 녀석이, 아민이 초록색 눈을 얕게 구겼다. 하지만 손끝으로 밀어내는 일은 없었다. 이미 반쯤 헤집어진 티셔츠에 싸여있던 늘씬한 허리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작게 뒤척였다. 그 채로 아민은 짧게 대답했다. 어, 하고 낮고 나른하게.


"꼴려."

"귀신 나온다고."

"경찰보단 낫네."


웃기는 새끼. 짧게 뱉고 딘은 아민의 목덜미에 제 콧날을 느리게 문질렀다. 커다란 손가락으로 티셔츠를 밀어 올리는 동안 아민은 딘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왈칵 힘을 줬다. 목덜미께에 쪽, 하고 떨어진 키스에 아민의 어깨가 다시 움찔했다. 나른하게 구겨진 진초록색 눈이 깜박이는 법도 없이 딘을 올려보았다. 욕망에 눌린 듯 낮고 쉰 목소리가 또 한 번 나른하게 공기를 울렸다.

"멈추면, 죽여 버릴 거야."

"와, 씨발. 존나 무섭네. 왜, 자르냐?"

"쓸 데 못 쓰면."

"협박이냐, 그거?"

"어. 그니까 박으라고. 죽고 싶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꼴리는 소리를 이렇게 살벌하게 하지, 다이어씨는."


낮은 웃음과 함께 딘은 아민의 이마에 짧게 또 키스했다. 전형적인 코카서스라기엔 다소 선이 고운 콧날을 따라 미끄러지리더니 이내 숨쉴 틈도 없이 입술을 찍어 눌렀다. 온 사방에 젖은 숨소리, 간간이 섞여오던 낮은 웃음 뿐이었다. 얕게 깨물고 헤집으며 둘은 몇 번이고 그 채로 각도를 틀어가며 키스했다. 간단히 숨이 가빠질 법한 키스였던가. 그럼에도 호흡곤란이 오지 않은 건 느닷없이 끼어든 목소리 덕분이었다.

누군가, 창살 바깥에 선 채로 말을 걸었다. 웃으면서.


"오늘은 야외 떡?"

"떡은 무슨 씨발 우아아아아아악 ㅡ!?!?!!!"


느닷없이 들린 낯선 소리에 딘이 저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뭐야, 씨발. 귀신? 진짜 귀신!?! 한참 달게 물고 빨던 아민에게서 용수철처럼 떨어지며 딘은 기어이 고함을 질러댔다. 놀란 건 아민도 마찬가지였다. 굉장히 놀란, 그러나 전혀 놀란 듯 보이지 않은 듯 덤덤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아민은 슬그머니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다 창살 너머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딘이 먼저 억 했다. 어둠 속에서 웃고 있던 건 짧은 적발 곱슬머리, 그리고 오늘따라 유난히 색이 서늘해 보이는 청회색 눈동자였다.


"좋은 밤이야, 아민군. 그리고 드미트리군. 아, 도너츠 먹을래?"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녀석이, 그렉이 들고 있던 도너츠 봉지를 불쑥 내밀었다. 크림을 얼마나 끼얹었는지 여기까지 단내가 진동할 지경이었다. 저 새끼는 저렇게 쳐먹고 충치 하나 없냐고. 뻘한 짜증을 삼키며 딘은 기어이 눈을 구겼다. 존나 됐거든요!? 하고.


"왜? 맛있는데."

"와, 씨발.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데?"

"왜냐니, 당연하잖아? 밤 근무중."

"세금 쳐먹는 한량인 줄 알았더니."

"할 땐 하는 거야, 드미트리군. FBI의 정보부는 우수하니까? 아, 괜찮아. 나는 신경쓰지마. 발기 중이잖아?"


천년의 발정이 식는다는 것은 이런 순간에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덧붙은 말에 딘의 얼굴이 문자 그대로, 썩었다. 아오, 개같은. 욕을 뱉어가며 주섬주섬 허리춤을 수습하고 있는 딘과는 달리 아민은 여전히 별 표정이 없었다. 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끝을 가볍게 빨면서 그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놀리는 투였다.


"미안. 방금 나 완전 눈새?"

"존나 당연한 걸 묻긴 왜 물어, 씨발!!!!!!!!"

"근데 알고 있어? 아이오와에서는 5분 이상 키스하면, 위법. 여기에 공연음란죄가 추가 되면 벌금이 살짝 세지기는 할 거야. 그치?"

"......"

"어떤 걸로 기소 해줄까?"


그때 딘은 생각했다. 이 재수 털리는 FBI의 모가지를 어떻게 하면 잘 꺾었다고 소문이 날까. 어떻게 해야 저 쳐얄미운 빨간 곱슬 머리를 꿈에서도 보지 않게 될까.





# 5

그 남자가 타임워너 센터 주거층의 입구에 나타났을 때 시선을 박아넣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텔의 벨보이도, 막 출근을 끝내고 머리를 틀어올리고 있던 로비의 여직원도, 투숙객 명단을 체크하며 직원들에게 잔소리를 쏟아붓고 있던 매니저도, 로비의 너른 소파에 몸을 파묻고 신문을 들척이던 영국의 노신사도, 그와 동행했던 비서마저도 모두 한결 같은 반응이었다. 남자는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도 익숙했고, 또한 어떤 가드에게도 저지를 받는 일이 없었다. 은빛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하프 타입의 퍼 코트를 이따금씩 추스르며, 남자는 늘씬한 손끝으로 쓰고 있던 까르띠에의 선글라스 프레임을 우아하게 밀어올렸다. 늘씬한 몸에 꼭 맞는 디올옴므의 블랙 수트, 구찌의 구두와 하얀 손목 위로 슬쩍 비쳐 보이던 쇼파드의 기계식 손목시계까지 모자랄 것이 하나 없었다. 다른 지역이었으면 그에 비해 지나치게 어려 보이는 남자의 생김을 의심했을 법 하지만 여기는 공교롭게도 뉴욕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한참 떠오르는, 때문에 아직 얼굴이 낯선 셀럽 중 한 사람이겠니 했다. 자기 브랜드를 론칭한 신진 디자이너거나, 배우거나, 아니면 그냥 부모가 돈이 많거나.

남자는 주변의 시선에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속도 한 번 늦추는 법 없이 홀을 가로지르는 동안 누구 하나 남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뉴욕에서 가장 비싼 콘도, 타임워너 펜트하우스의 가장 큰 자랑이라는 철저한 보안검색도 남자를 비켜 갔다. 가드들은 남자에게 어떤 검색도 요구하지 않았고, 남자는 가드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선글라스의 프레임을 살짝 끌어내리며 눈인사를 했다. 길고 긴 속눈썹 아래 색 짙은 초록눈마저 남자의 복장처럼 기품이 넘쳐 흘렀다. 때문에 누구도 남자에게 그 이상의 불필요한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남자가 홀로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에도 로비의 매니저는 꾸벅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남자는 그를 향해 가벼운 손짓으로 인사를 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는 50층에 멈춘 듯 했다. 하필 오늘 아침 50층 복도의 CCTV 중 한 대가 고장 났다. 먹통이 된 CCTV는 지금으로부터 1시간 뒤, 즉 아침 9시가 되어야 수리가 완료된다는 듯 했다. 때문에 타임워너 센터의 보안팀 중 그 누구도 남자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누구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남자의 이름은 아민 리 다이어, 소위 아민이라고 불리는 듯 했다. 세상은 그를 두고 에일이라고 불렀다. 오로지 한 남자만이 그를 전혀 다른 애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에이(A), 혹은 에이스 (Ace).

50층에 내려선 아민은 잠시 CCTV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초록불이 켜져 있었지만 아민은 이미 그 CCTV가 고장 나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흘깃 보던 시선을 걷어내고, 아민은 목에 매둔 넥타이를 손끝으로 잡아 풀어가며 복도를 잰걸음으로 걸었다. 늘씬한 다리로 카펫 위를 고요히, 성큼성큼 밟아나가며 두 번의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가장 안쪽의 룸 앞에서 아민은 멈춰섰다. 룸 넘버, 5003. 찾던 번호임에 틀림없었다. 그 앞에 선 채로 아민은 초인종을 누르거나 노크를 하는 대신 퍼 코트 속에서 검은 벨벳 장갑을 꺼내 손에 끼웠다. 틈 하나 없이 끼워넣은 장갑 채로 가볍게 손을 풀고, 아민은 손톱 하나 정도의 간격을 남겨두고 현관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들으며, 장갑을 끼고 있던 양손이 현관문의 오토록을 향해 움직였다. 왼손은 문고리를 잡고, 오른손으로 액정의 패널을 열었다. 열린 패널 위에 9개의 숫자판이 나타났다. 통상적인 키패드는 늘 청소를 하는 모양인지 지문 하나 없이 깔끔했다. 아민은 오른손 검지를 놀리며 천천히 그 액정 위를 가만히 쓸기 시작했다. 손을 한 번 떼지 않고 미끄러지는 탓에 키패드는 아민의 동작을 터치로 인식하지 못했다. 소리 없이 고요한 키패드를 천천히 짚어가며 아민은 소리 없이 숫자를 삼켰다. 5,1,9에 0이 두 개, 그리고 6. 한 번 쉬고 8이 연달아 세 번. 결론을 내린 아민의 검지가 빠른 속도로 9개의 패스워드를 찍었다. 마지막 8을 누르자 문 안쪽에서 작게 록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록이 온전히 다 돌아가기도 전에 아민은 벌컥 문부터 잡아 당겼다. 그 채로 아민은 너른 실내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다른 어떤 건 보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목표한 바가 정해져 있는 사람인 양 한 눈 한 번 팔지 않은 채 아민은 너른 실내를 걷고 또 걸었다. 아민의 걸음은 침실을 열어젖힌 후에야 비로소 멈췄다. 훌쩍 열린 휑한 침실 위에 '목표'가 있었다. 시트를 끌어안고 침대 바깥으로 반쯤 튀어나간 채로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는 레오파드 드로즈의 남자를 보며 아민은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대신 성큼성큼 걸어가 있는 힘껏 그 등짝을 걷어찼다. 여전히 잠결을 헤매던 갈색 머리가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머리를 부딪치자마자 녀석이 꽥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참으로 가관이었다.

"또 어떤 새끼가 아침부터 지랄... 헐, 씨발?!"


강제 기상 당한 갈색 눈이 와작 구겨지다, 이내 커졌다. 잠이 단번에 씻겨나간 듯한 그 얼굴을 아민은 고요히 들여다봤다. 자신을 내려보는 진초록 눈을 올려보며 녀석이, 드미트리 티모시 안넨코프가, 즉 딘이 다시 한 번 기가 찬 듯 되물었다. 귀신이라도 만난 듯한 얼굴이었다.


"너같은 거 고소하려면 뭐하는 짭새랑 상담해야 되냐, 어?! 이거 존나 무단침입이라고."

"알아."

"아는 사람이 현관 문 따고 들어오고? 다이어씨 재주 존나 좋다?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고. 일부러 레나랑 켄한테도 말 안 했는데?"


원숭이도 나무에선 굴러떨어지고 취미가 연방 보안 서버 터는 일이라던 이 바닥 최고의 해커도 보안을 털릴 때가 있다. 그게 딱 지금이었다. 역시 어제 오자마자 보안부터 싹 갈아 엎었어야 되는데. 망할 타임워너 센터 보안은 미국 최고라면서 뭐가 이렇게 허술해빠졌냐고, 씨발. 가드들은 뭐하냐. 저런 수상쩍은 놈 신변 조사도 안 하고 멀쩡히 올려보내게. 기가 막히려니 온갖 생각이 다 치밀어 올랐지만 딘은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전히 아민 때문이었다. 딘의 말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아민은 제 핸드폰을 꾹꾹 눌러댔다. 그리고는 대뜸 딘을 향해 핸드폰을 휙 던져주었다. 핸드폰 화면에 떠있는 것은 트위터였다. 'Actor, Jerry Heison' 이라고 쓰여있는 트위터의 계정에는 이 집의 풍경과 꼭 같은 사진들이 갤러리에 더러 걸려 있었다. 그 화면에 기가 막힌 듯 딘이 재차 되물었다. 씨발 이건 또 어떻게 털었는데?!

"너 존나 밥벌이 바꿔야 되는 거 아니냐?! 도둑질 왜 하냐고, 해커나 하시지."

"가르친 건 너야."

"니 몸 지키라고 가르친 거지, 휴가중인 옛날 애인 펜트하우스 현관 따라고 가르쳐준 기초 해킹 아니시거든!?"

"그럼 연예인 흉내를 내지 말든가. 내 눈에 걸리잖아."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거고, 귀중한 물건일수록 금화더미 속에 숨기란 말 모르냐?"

"몰라."

"야, 넌 중국계라면서 무... 됐다, 됐어. 말을 말아야지, 어?"


결국에 백기를 드는 건 이번에도 여지없이 이쪽이었다. 저거랑 말을 섞어서 사람 대화가 되느니 내가 차라리 내 똘똘이한테 말을 걸고 말지, 씨발. 결국 다 포기한 듯 딘은 손을 휘휘 저으며 자리를 털었다. 화재를 적당히 희석시키며 딘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왜 왔어, 하고.


"작업하자."


짧게 떨어진 대답에 딘이 잠깐 눈을 크게 열다, 이내 픽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렇지. 너란 놈이 이런 일 아니면 나한테 쳐들어 올 이유가 전혀 없지."

"큰 건이야."

"다이어씨가 물어오는 일인데 째째하겠냐, 그럼? 그놈의 돈 때문에 남의 목숨줄이 간당거릴 정도의 스케일이신데."

"싫음 됐고."

"누가 싫댔냐고, 누가!"

"..."

"뭔데, 이번엔."


한 발을 뺐더니 역시나 덥썩 미끼를 물었다. 이런 놈이라 어쩌면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아민은 잠깐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은 그저 덤덤했다. 아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채로 가볍게 침실을 가로지르더니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어냈다. 촤르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맨하튼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아민은 그제야 말을 받았다. 맨하튼을 내려보는 진초록빛 눈처럼 목소리도 퍽 무심했다.


"지난 번에 뉴멕시코에서 공중증발했던 현금 트럭 기억해?"

"기억하지, 씨발. 3천만불이 눈앞에서 사라졌는데 그걸 내가 잊겠냐고."

"그 돈이 이번에 다시 나타났어. 정확하게 말하면 그 돈의 루트가 확인 된 거지만."

"호세를 족쳐도 안 나왔는데 확인됐다고? 농담 하냐? 카르텔 마피아 수장도 모른다는데. 그 새끼들은 돈 앞에선 시침 뗄 줄을 모르는 족속들이라고."

"알아. 그리고 맞아. 모를 거야. 이건 그쪽 루트와 관계 없던 돈이니까."

덧붙은 말에 딘이 잠깐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도통 이해가 안 가는 듯 눈을 구기더니 이내 아, 했다.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은 듯 했다.

"실어나르던 놈들이 모른다면, 뭐냐. 누가 잡아챘나."

"아마."

"누군데?"

"러시아."


짧게 대답하고, 아민은 남은 커튼을 마저 걷어냈다. 촤르륵 소리와 함께 남아있던 풍경이 유리 너머로 시원하게 펼쳐졌다. 아침 해가 발갛게 떠오르는 맨하튼의 스카이라인은 아민도 저도 모르게 멈칫 할 정도로 참 예뻤다. 빌딩 틈에 비치는 햇살을 가만히 내려보며 아민은 잠시 두터운 유리 위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러다 흠칫 했다. 등 뒤에서 돌아온 대답 때문이었다. 그 대답이, 이상했다.

"러시아라고 했냐, 지금."

"어."

"간다고, 러시아를, 다이어씨가."


그때 아민은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받아치는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평소처럼 욕을 하지도 울컥 열에 받쳐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차가웠다. 뒷덜미에 와서 닿는 서늘함에 아민은 저도 모르게 다시 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딘은 웃지 않았다.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눈이 그토록 차갑게 자신을 보고 있던 모습은.


"니가 왜."


그때 알았어야 했다. 이토록 사소한 순간이 모든 불행의 전조였다는 사실을.







글을 씁니다. | 트위터 @ruka_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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