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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아, 야옹아 ~13

1차 창작 BL






좁은 계단 위로 어스름 빛이 어렸다. 오렌지색 할로겐이 가파른 경사를 타고 점점이 떨어졌다. 10시를 넘어서면서 골목길은 제법 한산해졌다. 웃음소리, TV소리, 음악소리, 전화하는 소리 등 온갖 소리들이 어둠결을 왕왕 울렸다. 지금 잠들기에 서울의 밤은 너무 환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서울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찬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에선 드문드문 별 같은 빛들이 반짝거렸다. 저건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이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가짜별들. 인간이 띄워올린 작은 별.

참 가짜가 많은 세상이다. 생각에 이찬은 픽 웃다, 이내 울컥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순식간에 일그러진 얼굴이 씩씩대며 가쁜 숨을 뱉어냈다. 씨발, 헉, 존나.


“지효경, 내가, 진짜, 어오,…”


계단을 걸어 오르는 다리가 연신 후들거렸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등줄기에서 주륵 땀이 흘렀다. 금세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이찬은 힘껏 힘을 주며 걸음을 디뎠다. 실컷 올라온 것 같은데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계단의 끝이 까마득했다. 숨을 가다듬으며 이찬은 다시 한 번 이를 꽉 악물었다. 등 뒤에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단단히 업혀 있었다. 이찬의 목에 팔을 두르고 누워있던 하얀 얼굴에서 숨소리가 쌕쌕 터졌다. 참 잘도 잔다. 이찬이 헛웃었다. 기가 막혀서.


“저기요, 지효경씨.”

“……”

“효경아.”

“…으, 어? 집? 집이야아? 집? 다와떠어?”


반쯤 몽롱하게 감겨있던 눈결이 그제야 부스스 열렸다. 숨결을 따라 소주 냄새가 코끝을 훅 찔렀다. 자꾸만 등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지는 몸을 몇 번이고 추스르면서 이찬은 거듭 숨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나쁜 건 네가 아니지. 다시 효경을 등에 업고 계단을 오르면서 이찬은 생각했다. 애초에 효경의 주량은 그렇게 약한 편은 아니었다. 이만큼 만취하도록 만든 건 순전히 제 탓이었다. 이찬이 잠시 제 등에 업힌 효경을 돌아봤다. 스르륵 감긴 긴 속눈썹이 흠뻑 젖어 있었다. 쓰게 웃음이 터졌다.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나만 악역이야, 씨발. 웃으며 이찬은 우물거렸다. 업혀 있던 효경이 어? 하곤 말을 받았다. 엉망으로 꼬부라진 혀가 멋대로 떠들었다. 뭐라 해써어?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를 이찬은 대강 받아주었다. 어, 그래그래. 그리고는 다시 자세를 고치며 미끄러지던 엉덩이를 단단히 받쳐 업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이찬의 얼굴이 가로등빛에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길은 이미 어두웠다. 까마득한 계단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속은 괜찮냐, 너?”

“우으… 어, 아… 아니, 흐. 아퍼. 히히.”

“그러게 누가 거기까지 마시랬습니까.”

“그치만, 기분… 좋은데에, 흐…”

“어, 그래.”


좋기는 무슨. 아닌 거 다 알거든, 바보야. 생각하면서도 이찬은 구태여 이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 내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심장이 흔들흔들 춤을 추었다. 저리고 아팠다. 호프집에 있을 때부터 계속 이어지던 통증이었다. 자신이 무심하게 한 마디를 툭 던질 때마다, 또 마음을 감출 줄 모르는 효경의 눈꼬리가 서글프게 가라앉을 때마다 가슴은 자꾸만 쓰리고 저렸다. 꼭 누군가 불꽃으로 그을린 것처럼 아팠었다. 덴 것마냥 욱신거리다 효경이 울음을 터뜨렸을 땐 숨이 콱 막혔다.

그래서 차마 말리지를 못 했다. 효경은 순식간에 맥주를 비우고, 또 새로 시키기를 반복했다. 급하게 마신 술은 취기도 그만큼 빨리 올랐다. 웃다가, 짜증내다, 화를 내다, 울다를 반복하며 효경은 수시로 욕을 했다. 개새끼야, 씨발놈아. 욕을 실컷 하다가도 효경은 넘어가는 제 몸을 이찬이 잡아주기라도 하면 그 얼굴을 향해 흐 웃으며 아양을 부렸다. 그러는 사이에 몸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했고, 테이블에 엎어져선 고개도 못 들고 히죽이죽 웃는 효경을 이찬이 겨우 일으켜 세웠다. 계산은 이찬이 했다. 어깨에 팔을 두르게 하고 단단히 부축해 걷는동안에도 효경은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 했다. 지나가던 낯모르던 소녀들에게 안녕 하고는 인사를 했고, 횡단보도 앞에서는 노래를 불렀다. 코러스를 넣어주지 않는다고 이찬에게 성질을 내다 켄터키 아저씨와 힘껏 포옹을 했고, 차 범퍼 위로 엎어지거나 길고양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을 걸어대는 통에 이찬은 한참동안 진땀을 뺐다. 신나게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까지 추다 동네 슈퍼 앞까지 온 후에야 효경은 겨우 얌전해졌다. 벽에 기대 주저앉은 효경을 등에 업으면서도 이찬은 효경이 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효경을 등에 업고서 한 번도 가보지 못 했어도 그린 듯 훤히 알고 있던 길을 따라 걸었다. 업힌 등이 기분 좋았는지 효경은 버둥거리나 하지 않았다. 제 등 위에서 쌔근쌔근 아이처럼 잠든 얼굴이 귀여워서 이찬은 픽 웃다가도 습관 같은 통증을 느꼈다. 자꾸 아팠었다. 아픈 게 효경의 심장인지, 아니면 제 심장인지 이찬은 끝내 알 수 없었다.


“어, 다 왔…”

“집이다아아아―”


계단은 오래지 않아 끝났다. 다 왔다는 말을 다 맺기도 전에 효경은 이찬의 등에서 풀쩍 뛰어 내리다, 또 한 번 크게 휘청거렸다. 이찬이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효경을 잡았다. 효경이 잡힌 팔을 크게 홱 떨치며 우물거렸다. 됐어, 혼자 걸을 수 있어. 그리고는 제 집 쪽을 향해 휘청휘청 걷기 시작하는 효경을 잡아줄까, 하다가 이찬은 이내 말았다. 방은 아직도 훤했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나보지. 생각하며 숨을 가다듬다 이찬은 돌연 눈끝을 일그러뜨렸다. 효경이 통통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찬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효경을 기다릴만한 사람이라곤 딱 하나 밖엔 없었다.

그 망할 호랑이.


“호율아아아아― 형 왔다아? 문, 문 열어줘어어―”


혀가 잔뜩 짧아진 말투처럼 노크를 하던 주먹은 자꾸만 문 위를 헛돌았다. 귀엽다. 귀여운데도 이찬은 웃을 수가 없었다. 문은 곧바로 열리지 않았다. 효경이 연거푸 노크를 하며 우물거렸다. 열어줘, 열어 달라니까안? 노크 소리가 조금씩 조급해졌다. 이찬이 쓰게 웃었다. 이 주변에 집이 저 하나 뿐인 게 다행이다. 아니라면 진작 시끄럽다고 항의라도 들어왔을 테니까. 생각하며 이찬이 그제야 비적비적 걸어 효경에게 다가갔다. 인사를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오빠 간다. 짧게 던진 인사에 긴 눈꼬리가 부스스 이찬을 돌아봤다. 왜? 2차 안 해? 되묻는 말에 이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2차는 무슨.


“너도 많이 마셨어. 얼른 들어가서 씻고 오늘은 푹…”

“가지마아…”


말을 다 맺기도 전에 손목을 잡혔다. 효경을 돌아보던 둥그런 눈이 순간 울컥 흔들렸다. 잡은 손목에 꽉 힘을 주면서 효경이 고개를 털었다. 가지마, 이찬아, 가지마. 응? 이찬이 볼 안쪽을 힘껏 깨물었다. 쓸데없는 소리가 나올 뻔 했다. 좋아야 하는데, 이게 예뻐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예쁘고 좋은 마음이 들기 전에 미안함이 먼저 고개를 드는 탓이었다. 지금이야 술에 취해 이러는 거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넌 분명히 나를 미워하게 되겠지. 아니면 또 울게 될까, 넌.

이찬이 쓰게 웃었다. 왜 하필 나였을까, 넌. 꽉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던 손이 스르륵 효경의 눈가를 매만졌다. 효경이 움찔 하다, 이내 흐 웃었다. 눈가는 아직도 불긋불긋 했다. 그게 술에 취한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찬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얼굴이 자꾸만 아팠다. 차라리 숨이라도 멎었으면 싶었다. 네가 아니라 내가 나빠서. 내가 난 너무 미워서, 효경아.

그때였다. 단단히 닫혀 있던 문 안쪽에서 잠금이 풀리는가 싶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덜컥 열린 문소리에 효경과 이찬이 동시에 문 안쪽을 돌아봤다. 열린 문 안쪽에서 황금색 눈동자가 울컥 일그러졌다. 웃음조차 없었다. 입술 끝을 질근 씹으며 호율이 둘을 한참 말없이 노려보았다. 그 얼굴에 효경이 활짝 웃었다. 그래도 딴에는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호율아아아― 나 기다렸어? 기다려준 거야?”

“…누가요. 안 기다렸어요.”

“우리 호율이, 종일 머해써어? 밥 먹어써어?”

“시끄럽고, 들어오기나 해요.”


돌아오는 대답이 차갑고 딱딱했다. 긴 눈꼬리가 스르륵 가라앉았다. 화났어? 눈치를 보듯 물어보는 말에 호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호율은 아직도 이찬의 곁에 서 있던 효경의 손목을 힘껏 잡으며 제 쪽으로 끌어 당겼다. 순간 힘에 끌려간 효경이 휘청거리면서 호율의 품으로 쏟아졌다. 효경이 눈 끝을 울컥 일그러뜨렸다. 야! 솔직하게 터지는 짜증에도 호율은 대꾸가 없었다. 그 채로 호율은 효경을 가만히 안쪽으로 떠밀었다. 들어가 있어요. 취한 탓인지 효경은 금세 또 표정을 바꿨다. 힘을 따라 비척비척 안으로 걸어 들어가더니만 신발도 벗지 않곤 거실 바닥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잠깐 그 모습을 건너다 보다 호율은 다시 문 바깥쪽을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황금색 눈동자가 어둠결에도 타는 듯이 선명했다. 이찬이 픽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웃지는 않았다. 이찬도, 호율도.


“이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기다리다니, 씨발, 존나 착하네. 지효경 사촌동생.”

“그러게요. 인사 같은 거 할 필요 없죠? 일 끝났으면 가요.”

“와, 요새 호족들은 예의범절 없는 게 트랜드인가보네. 니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호랑이 왕자란 새끼가.”

“그럼 나만큼 나이 처먹고 오시든가요. 내 나이 반 토막도 안 되는 게 되게 까부시네요.”

“로마에 오면 로마법 따르란 소리도 모르냐? 맹안도 쓸 줄 모르는 호족 새끼한테 굽신 거릴 이유가 전혀 없거든, 나는. 젖내가 아주 코를 찌르네, 씨발.”


황금색 눈동자가 울컥 일그러졌다. 어디서 애 취급이야, 우리 아빠도 아닌 게. 저도 모르게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가는 걸 호율은 가까스로 참아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결국 여유를 부리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찬이었다. 그게 호율은 분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도 틀린 말이 아닌 탓이었다. 게다가 정말 화가 나는 건 이찬보다는 효경이었다. 딱 봐도 평소랑은 다르다. 취했다. 이 시간에 취한 것도 짜증이 나는데, 저 망할 인간의 등에 업혀서 돌아오다니.

효경과 헤어지던 때에만 해도 호율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효경이 맡긴 쇼핑백을 들고 집에 돌아와선 저녁 내내 나름 잘 놀았었다. 냉장고에 가득 채워져 있던 참치와 스팸으로 저녁을 때우면서 TV를 봤다. TV에서는 야구라는 걸 하고 있었다. 작은 공에 대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게 재미있어서 한참을 보다보니 금방 해가 졌다. 남쪽으로 몰려간 비구름 탓인지 경기는 몇 번이나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고, 끌려가던 팀에서 9회말에 만루 홈런이 터지면서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가 되었다. 결국 어느 쪽도 승부를 내지 못하고 연장 12회말까지 모든 경기가 종료 되었을 때에도 효경은 오지 않았다. 시계가 자정을 가리킬 무렵에야 효경은 돌아왔다. 하지만 효경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옆에 하필 이 인간이 있었다. 단군의 아이. 그 이전에 지효경을 가장 많이 울게 했던 바로 그 이름, 해이찬.

웃긴다. 호율이 소리 없이 비실비실 웃었다. 지효경 눈이 낮아도 너무 낮았다. 이런 인간 때문에 그렇게 혼자 아팠다니.


“울었죠.”

“……”

“지효경 울었냐구요.”


마주 보던 갈색 눈이 옅게 움찔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 끝을 쓰게 접으면서 이찬은 슬며시 말꼬리를 돌렸다. 뭐, 그런 건 됐고.


“야, 호랑이 왕자.”

“…왜요.”

“말하지마.”

“……”

“절대로 말하지 마라, 효경이한테.”


뭘 말하지 말라는 거냐고 호율은 굳이 묻지 않았다. 알고 있는 탓이었다. 알아채니 웃음이 났다. 이번만큼은 호율도 웃음을 참지 않았다. 입꼬리를 힘껏 뒤틀며 짧게 비웃고, 호율은 미련 없이 문을 닫았다. 허. 이찬이 기가 막힌 듯이 헛웃었다.


“호족은 호족이네, 씨발. 성질 더러운 걸 보니.”


문 안쪽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시끄러웠다. 효경이 왁 소리를 질렀고, 이내 잠잠해졌다. 싸우나. 생각하다 이찬은 쓰게 웃었다. 어차피 호율은 말하지 않을 거다. 자신의 정체를 효경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선 먼저 밝혀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 중엔 호율 자신이 감추고 있는 비밀도 있겠지. 그래서 호율은 분명 효경에게만큼은 비밀을 굳건히 지킬 것이다. 그 누구 때문도 아닌 호율 자신을 위해서.

하여튼 수컷이란 것들은. 우물거리다 왠지 픕 웃음이 샜다. 그 말이 재미있어서 이찬은 작게 소리를 삼키며 웃었다. 낮게, 또 짧게 한참을 웃다 서서히 바람처럼 엷어졌다. 웃음이 끊어질 땐 어쩐지 눈물이 났었다. 가슴이 아파서 그랬다. 심장이 저려서 이찬은 그랬을 것이다. 이 통증은 효경 때문이 아니었다. 이찬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 * *


누운 채로 효경이 흐 웃었다. 가늘게 접히던 눈결처럼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호율아아아아―”


문을 닫고 들어서면서 호율은 잠시 효경을 쳐다봤다. 신발은 아직도 벗지 않았고, 여전히 거실 바닥에 찰파닥 드러누운 채로 효경은 연신 히히 거리며 웃었다. 바닥에 웅크리고 이리저리 바르작거린 통에 티셔츠는 이미 반쯤을 밀려 올라갔다. 흉골까지 쭈욱 밀려올라간 셔츠 아래로 드러난 피부는 유난히 울긋불긋 했다. 하얬던 피부는 온몸 곳곳이 다 붉었다.

딸기도 아니고. 봄철이면 천지의 텃밭에 붉게 맺히는 과일을 생각하면서 호율은 효경의 곁에 웅크려 앉았다. 언짢은 것 이전에 일단 수습은 해줘야 할 것 같아 그랬다. 신고 있던 운동화의 끈을 풀어주던 동안에도 효경은 쉼 없이 꿈질거렸다. 안 그래도 익숙하지 않은 손이 몇 번이고 매듭 위를 헛돌았다. 매듭 한 번 단단히도 묶었다. 말도 없이 볼 안쪽을 꽉 짓씹은 채로 호율은 운동화의 매듭에 열중했다. 효경이 흐 웃었다. 취해도 보통 취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야옹아아아, 나, 오늘 기분 되게되게 조타아아?”

“퍽도 좋겠네요. 얼마나 마셨어요?”

“쪼오금! 진짜다? 나 마악, 히― 얼마 안 머거썽―”

“웃기지 마요.”


여기까지 술 냄새가 폴폴 풍기는데 무슨. 술은 호율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었다. 호족들은 술을 즐겨 마시고 좋아하며, 천지에는 독자적으로 술을 빚어내는 기술도 존재했다. 아버지는 특히 국화주를 즐겨 담갔었다. 보통 성호가 되지 않은 새끼에겐 술을 권하지 않는 것이 호족의 예였지만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마다 아버지는 음복을 핑계로 호율에게 한 모금씩은 맛보게 해줬었다. 장로들이 잔소리를 할 때마다 어리다고는 하나 호족은 타고난 피가 강할수록 정화력이 높아 취하지 않는다며 아버지는 너스레를 떨곤 했었다. 허니 술이 낯설어서 맘이 언짢은 것이 아닐 터였다. 단지 취했기 때문에 불쾌한 게 아니란 사실도 호율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그런 쓸데없는 얼굴을 달고 와서. 매듭을 뜯듯이 잡아 당기며 호율은 생각을 질끈 짓씹었다. 단단히 묶여 있던 끈이 그제야 스르륵 풀어졌다. 벗겨낸 워커 한 쪽을 현관으로 대충 집어 던지고 남은 워커도 마저 풀기 시작했다. 효경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식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 신나고 즐거운 건진 모르겠지만.


“호율아아, 우리도 술 먹자아아―”

“됐어요. 주정뱅이랑 대작하는 취미 없거든요,”

“왜애? 호랑이는 술 안 먹어? 술! 술 먹자아! 히히. 아, 더워…”


남은 워커 한 쪽을 쑥 벗겨낼 때 효경이 비척거리며 돌아누웠다. 창은 전부 열었고 밤바람도 제법 서늘했지만 취기 탓인지 아무래도 열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다. 흘긋 올려보다 호율은 효경의 발에서 양말까지 마저 벗겨냈다. 마른 발목 아래로 하얀 발등이 유난히 시야를 훅 찔렀다. 핏줄이 엷게 보일 정도로 얇은 피부는 열이 올라 곳곳이 불긋불긋했다. 연분홍빛으로 달아오른 피부색에 호율은 잠깐 손을 멈칫 했다. 티 하나, 점 하나 없는 발등은 도자기 표면처럼 매끄럽고 보드라웠다. 손끝으로 하얀 발등을 스윽 문질렀을 때 효경이 흡, 짧게 숨을 삼키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호율의 눈이 잠시 둥그렇게 열렸다. 또야. 또 그 냄새다. 호율이 미간을 울컥 좁혔다. 공기가 달았다. 너무.


“잠깐, 간지러어… 호율아, 그만, 간지럽다니까아, 흐흐, 그ㅁ, 읏,”


발등을 문지르던 손길이 조금씩 대담해졌다. 이유는 모르겠다. 손바닥을 넓게 펼치면서 호율은 스르륵 효경의 발등을 매만졌다. 만지고 싶어. 호율이 마른 침을 삼키며 하얀 피부 위를 집요하게 문질렀다. 손만큼 예쁘게 빚어놓은 듯한 발가락에 손깍지를 끼었다 놓았을 때 효경이 다시 짧게 떨었다. 간지러운 건지 효경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허리를 당기면서 호율이 왼쪽 발목을 단단히 잡아 눌렀다. 남은 손이 느리게 발등을 쓸어올릴 때 효경이 크게 허리를 펄쩍 꺾었다. 그만, 그마안. 늘어지는 말꼬리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이 신경 쓰여 눈을 들었다가 호율은 그대로 우뚝 시선이 박혔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결을 반쯤 감은 채로 효경이 제 입술 끝을 스르륵 짓씹었다. 다물린 잇새로 숨결이 달뜨게 헐떡였다. 호율이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떠돌던 공기가 짙게 달아올랐다. 달았다. 숨을 삼키면서 호율이 발목 위를 스르륵 쓸어 올렸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쩐지 탁했다.


“지효경.”

“으흥, 읏, 간지러어,… 호율아, 힉- 그만, 거기…, 흣,!”

“또 왜 그래요. 나 또…”


기분이 이상하잖아. 말을 흐리면서 호율이 제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자꾸 갈증이 났다. 왼쪽 발목을 내리 누르고 있던 손끝을 밀어 올리면서 호율은 슬그머니 효경의 몸 위로 올라왔다. 들썩인 통에 흉골까지 밀려 올라간 티셔츠를 느릿느릿 밀어 올리면서 남은 손으로는 간을 보듯 허리를 더듬었다. 취기 탓인지 제 몸 아래 놓인 효경은 묘하게 순했다. 만질 때마다 얕게 들썩이면서도 효경은 호율을 딱히 밀어내지 않았다. 비음이 잔뜩 섞인 숨결이 간헐적으로 끊어지며 헐떡였다. 호율아, 호율아. 그때마다 호율의 손 끝에 걸리던 하얀 피부에 지끈 열이 몰리며 붉어졌다. 호율의 눈끝이 곤란한 듯 일그러졌다. 조금씩 손길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호율이 바람처럼 얕게 웃었다. 웃는 것조차 어쩐지 조심스러웠다. 갈증이 나서, 어지러워서, 당신이 너무 달아서.


“왜 이렇게 귀여워요. 맨날 술 먹이고 싶게.”

“어? 아냐, 나 귀여운 거 아니… 시러, 잠깐, 호율아, 거기… 흐응, 간지러, 아하하, 흐…”

“이러면 화도 못 내잖아.”

“화나써어? 화내지ㅁ… 읏, 호유라아, 이상해애, 뭐가, 흐, 막, 만져어…”

“신경 쓰지 말아요.”


효경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호율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쁜 거 아니니까. 말끝을 뭉개면서 호율이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얕게 이를 세웠다. 효경이 크게 떨었다. 짓씹은 입새로 짧게 신음이 터졌다. 귀 끝까지 달아오른 얼굴이 어쩐지 정처를 잃어버린 아이 같았다.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서 곤란한 아이처럼 효경이 호율을 간절히 바라봤다. 귀여워. 호율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동시에 참을 수가 없었다. 생각을 삼키면서 호율은 허리를 만지던 손을 끌어올리며 셔츠 밑을 스윽 비집었다. 손길을 따라 셔츠의 넥 라인이 미끄러지면서 곧게 뻗은 목덜미가 하얗게 드러났다. 셔츠 밑을 매만지면서 호율은 효경의 목덜미에 허겁지겁 입술을 묻었다. 맞닿은 자리마다 쪽 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입을 맞출 때마다 효경이 얕게 어깨를 떨었다. 떨다, 낯설어하다 이내 또 프 웃었다. 바람만 불어도 웃는, 바람만 불어도 후드득 눈물을 쏟아내는 소녀처럼.


“그만, 바보야, 히히… 아, 맞다! 나 오늘, 흐… 해이찬 만났… 읏,”


호율이 잠시 멈칫 했다. 들린 이름이 하필 그 이름인 탓이었다. 목을 따라 느리게 미끄러지던 입술이 둥근 어깨 위에서 우뚝 굳었다. 호율이 슥 눈동자만 굴려 효경을 바라봤다. 효경이 흐 웃었다. 꼬리가 길게 놓인 눈이 오늘따라 유난히 발갰다는 사실을 호율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나아, 나 있지… 오늘 되게 이상했어. 막, 되게 화가 나서… 홧김에, 말해버렸다? 해이찬한테, 흐…”

“……”

“좋아한다고… 개새끼야, 너 좋아한다고! 내가 막 그랬는데,”

“……”

“차였다?”

“……”

“별로래. 남자랑 사귀는 취미 없대. 나는… 안된대. 흐, 키스도 했는데. 우리… 안 된대. 자기, 좋아하지 말래. 좋아하면 안된대.”

“……”

“그런 게 어딨어…”

“……”

“그딴 게 어디에 있어, 개새끼야.”


웃고 있던 눈가가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 채로 효경이 양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동시에 아이처럼 엉엉 울음이 터졌다. 잡을 새도 말릴 틈도 없었다. 흐어엉 설운 목소리가 한참을 꺽꺽 거리면서 울었다. 그 얼굴에 당황한 건 호율이었다. 이런 지효경은 처음이었다. 아이 같았다. 우는 법을 모르는 아이, 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 상처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 그래서 상처에 약한 아이, 아픈 가슴을 다독거릴 줄도 모르는 그런 아이. 아픔을 달래질 못하는 아이, 그래서 서러운 아이. 못내 서러워 우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아이.


“왜?”

“……”

“왜!”

“……”

“왜 나는 좋아하면 안돼?”

“……”

“왜, 나는 안 되는데?”


그때 호율은 처음으로 들었다. 제 안의 어떤 가느다란 실이 툭 끊어지는 소리.


“…!?! 잠, 너 뭐하는… ”


얼굴을 가리던 하얀 두 손이 순식간에 잡혔다. 동시에 그 두 손을 힘껏 짓누르면서 호율이 효경의 허리에 타고 앉았다. 아무리 취했어도 공기가 달라진 걸 효경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래도 좀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놔. 효경이 허리를 뒤틀며 소리를 질렀다. 비키라고! 호율은 대답이 없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탓인지 호율의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색 밝은 머리칼 밑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맵시 좋은 입매뿐이었다. 말없이 입매 끝을 밀어 올리며 호율이 씩 웃었다. 그 순간 효경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유난히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늘했다. 동시에 차가웠다. 그런 호율은 처음이었다.


“해이찬, 해이찬… 진짜 시끄럽거든요.”

“…뭐?”

“듣기 싫다고, 그 이름.”


효경의 눈이 크게 열렸다.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효경이 있는 힘껏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장난이 아냐, 이건 진짜 위험해. 하지만 꽉 잡힌 손목도, 제 허리를 타고 앉아 있던 몸도 꿈쩍하지 않았다. 키가 자신보다 약간 더 큰 것을 제외한다면 자신과는 크게 차이도 없는 체격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몇 번을 버둥거려도 꿈쩍도 하지 않는 힘의 차이에 효경은 그제야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잊고 있었다. 얘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거 놔. 안 놔!? 당장 놔, 이 미친 새끼야!”

“뭐야. 술 다 깼어요? 그럼 재미 없는데.”

“이게 진짜… 죽고 싶지? 놔. 안 놔!?!”

“어, 죽고 싶어요. 근데 딴 걸로 죽여주면 좋겠는데.”


씩 웃는가 싶더니 단숨에 손을 옮긴 호율이 한 손만으로 양손목을 간단히 움켜 쥐었다. 남은 손은 거리낌도 없이 효경의 몸 위를 미끄러졌다. 허벅지 안쪽을 꽈악 움켜잡았을 때 효경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흡 숨을 삼켰다. 그 모습에 호율이 씩 웃었다.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 같은 웃음은 순진했고, 그래서 기이한 위화감이 들었다. 어울리지 않아서 정말로 무서웠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러다 울컥 힘을 실으며 주물러 왔을 때 효경이 비명처럼 날카롭게 떨었다. 아팠다. 동시에 괴로웠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 눈가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잇새를 비집은 욕이 울음처럼 헐떡였다.


“개자식아, 놔, 하지, 아윽,! 흐, 읏,!”

“……”

“그만, 제발…, 아읍,!!”


날카롭게 비명이 울렸다. 크게 허리를 꺾으며 효경은 제 목덜미에 매달려 있던 색 밝은 머리를 힘껏 노려봤다. 이, 개 같은, 야옹이 새끼가. 얼굴을 들며 호율이 효경을 향해 가볍게 코끝으로 웃었다. 그때에도 황금색 눈은 웃지 않았다. 곧게 뻗은 목덜미엔 잇자국이 퍼렇게 찍혀 있었다. 효경이 입술 끝을 질끈 짓물었다. 아팠다. 그보다는 다른 것에 괴로웠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저 눈에, 저 꿰뚫을 듯 몰아붙이는 황금색 눈에.

무릎이 자꾸만 잘게 떨었다. 아닌 척 숨을 가다듬으면서 효경은 호율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젖은 속눈썹이 서럽게 떨었다.


“아프잖아, 이 씨발 새끼야!”

“아프라고 물었어요. 왜. 진짜 숨이라도 끊어줘요?”

“짐승이야? 어? 니가 짐승이야!?”

“어, 나 짐승 맞거든요. 그러니까 그 입 좀 닥쳐줄래요?”

“……”

“진짜로 아득아득 씹어 먹기 전에.”


기가 찼다. 하지만 웃지 못 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상해. 효경은 생각했다. 이런 거, 진짜로 이상해. 집요하게 눈길을 마주치면서 호율은 효경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짧게 중얼거렸다. 웃음도,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미안해요.


“…이젠 내가 못 참겠어.”


갈색 눈이 크게 흔들렸다. 어딘가에서 부욱 찢기는 소리가 들렸던가. 그리고 모두 우뚝 멈췄다. 말도, 움직임도, 이성도, 사고도, 현실마저도.








* * *


고요하다. 창 너머로 떠오른 달빛마저 숨을 죽인 그런 깊은 밤이었다. 누군가는 잠들었고, 누군가는 꿈을 꾸었다. 천지의 너른 못을 따라 흐르듯이 떠오른 달은 이제 제법 둥글게 차올랐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달은 비워지지도 채워지지도 않은 채 불안정한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빠짐 없이 차오른 둥그런 달은 하늘을, 천지를 비추고 천지 아래 너른 동굴까지 은은히 비추며 떠올랐다. 천지의 가장 깊은 곳, 족장의 집이 있는 남쪽과는 반대방향에 있는 집은 창부터 모두 북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천지의 푸른 물결을 유리처럼 이고 있던 너른 동굴에서도 유난히 담이 높은 집이었다. 북쪽을 향해 비스듬히 열린 창 너머로 달빛은 천지처럼 푸르게 쏟아져 내렸다.

달빛이 창 안쪽을 환히 비추며 쏟아졌다. 홀로 잠들기엔 너무나 큰, 둥글고 커다란 침상 위에 한 여인이 쌔근거리며 잠들었다. 많이 봐준다고 해봐야 기껏 스물 중턱을 넘었을까. 달빛 때문인지, 혹은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인지 여인은 한 번 본다면 누구라도 잊지 않을 정도로 미인이었다. 현제의 양귀비가 이만큼 아름다웠을까. 우연찮게 누군가 창 앞을 지나며 여인을 보았다면 선 자리에서 한참을 얼어붙었을 것이다. 달빛을 받아 밝게 부서지는 얇은 갈색 머리칼을 한쪽으로 길게 땋아 내리고, 한쪽 머리에는 그 하얀 피부만큼이나 눈부신 달맞이꽃을 살포시 꽂아 두었다. 티 한 점 없이 하얀 얼굴, 발간 입술과 모양새 좋은 콧날, 또 눈동자를 내리 덮고 있는 길고 섬세한 속눈썹까지 모두 그림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달은 여인을 비추며 서서히 중턱을 향해 움직였다. 여인이 달빛 속에서 스르륵 눈을 열었다. 촘촘한 속눈썹의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던 눈동사는 어둠 속에서도 맑게 빛을 냈다. 참으로 눈부시고 찬란한 황금색 눈동자였다.


“달.”


여인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인의 곁,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여인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잠들어 있던 또다른 여인이었다. 새카맣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던 여인은 지금의 그 여인과는 생김이나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역시 견줄 데가 없는 미인이었지만 여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날카롭고 차가웠다. 낮동안 천지의 모든 호족과 장로들이 우러러 보며 고개를 조아리는 여인이었다. 제 아들에게마저 모질고 차갑다던 여인의 이름은 연수(燕凁)였다. 천지에선 그녀를 이르러 제비꽃이라 즐겨 불렀다.


“아란(娥爛).”


연수가 여인을 돌아보며 이름을 불렀다. 달빛을 올려다보던 여인이, 아란이 연수를 돌아보며 함박 웃었다. 머리에 꽂은 달맞이꽃처럼 청초하고 말간 웃음이었다.


“으응.”

“왜 그래. 무서운 꿈이라도 꾸었어?”


유선이 살며시 아란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물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란이 고개를 고개를 흔들었다. 아란의 몸짓을 따라 침상 위에 펼쳐져 있던 밝은 갈빛 머리칼이 파도처럼 얕게 흔들거렸다. 사르르 흩어지는 머리칼을 손끝으로 가만히 휘어감으며 유선이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손을 펼쳐 아란의 이마를 연신 쓰다듬었다. 손아래에서 옅게 미열이 느껴졌다. 유선이 걱정처럼 눈썹을 좁혔다. 천지의 다른 누군가가 이런 광경을 보았더라면 누구라도 제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족장인 호연이 사라진 후로 족장의 대리인을 자처한 유선은 제 아들에게조차 웃음이 없었다.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조차 차가운 여인이 아란의 황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차피 아무도 보지 못한다. 이곳은 유선 자신을 제외하고선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 그것이 설령 이 호족들의 족장이라 하여도, 그가 아란의 하나뿐인 남편이라 하여도. 혹 족장의 아들이라 하여도, 아란이 백날을 꼬박 기도로 지새우며 낳았다는 그 하나뿐인 아들이라 하여도.

괜찮아. 아란이 프 웃었다. 유선의 체온이 익숙한 듯 아란은 가만히 유선의 가슴께로 파고 들었다. 어릴 적부터 오래도록 반복해온 듯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유선의 품에 웅크리면서 아란은 다시 창 쪽을 흘깃 돌아보았다. 천지의 물에 비쳐 파랗게 부서지는 달이 오늘은 제법 높았다. 아란이 꿈처럼 중얼거렸다.


“하늘.”

“응?”

“하늘이 열려.”


하늘. 말을 받던 유선의 눈길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천지의 물색과 꼭 닮은, 자신의 아들과 꼭 같은 옥색 눈동자엔 웃음기 한 조각 남아 있지 않았다. 아란은 여전히 창 너머를 보고 있었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망울을 끔벅이며 아란은 스르륵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 홀로 태양처럼 반짝거렸다. 그 얼굴이 어쩐지 우는 듯 했다. 눈물처럼 일렁이면서 아란은 거듭 꿈처럼 중얼거렸다. 하늘.


“하늘이… 열려. 해가 내려. 해가 ‘하늘’을 열고, 달이 ‘하늘’에 오르고…”

“……”

“이제 곧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거야.”


둥그런 황금색 눈동자 끝에서 또르륵 물기가 굴러 떨어졌다. 너무 슬퍼. 아란이 우물거리며 어깨를 좁혔다. 옅게 떨기 시작하는 어깨를 유선은 가만히 끌어안았다. 오래도록 반복해온 동작처럼 유선은 익숙하게 아란의 몸을 도닥이며 쓸어주었다. 괜찮아. 유선이 낮게 속삭였다. 속삭이며 아란의 이마에, 뺨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 란아. 아란이 아득히 눈을 감았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그림처럼 유려한 눈썹이 근심처럼 좁아졌다. 옅게 떨며 아란은 그 이름을 불렀다. 오래도록 보지 못한 이름, 그리운 이름, 그래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그 이름.


“호율아.”


이제 하늘이 열린다. 섭리에 따라, 또 이치에 따라.







* * *


그 밤, 누군가는 오래도록 가로등 빛 밑에서 숨을 죽여 울었다. 아득히 외롭던 밤, 서울의 밤이었다.




(계속)
















어떻게든 마지막 장면까지 오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더니 오늘도 여지없이 길어져 버린 것입니다..... 대체 편편이 왜 이렇게 긴지 (ㅠㅠㅠㅠㅠ 그래도 두 어머님들(?)이 첫등장하셨으니 후회 없는 것...


+ 야옹이에서 제 최애 커플은 연수아란입니다.. 리버시블 불가.. (???

+ 사실 다른 커플들은 읽어주시는 분들이 편히 봐주시는 게 저는 가장 좋습니다. 어떤 커플을 좋아하셔도 전 다 너무 기쁘고 좋을 것 같아요u////u 는 사실 호율이랑 은호가 너무 좋다는 감상을 받아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분께도 답 드렸지만 저는 젠젠 상관없사오니 편히 봐주시옵소서^///^ 효경이 왼쪽만 아니라면 저는 다 괜찮습니다 (mm.. 더불어 도리어 영광이에요ㅠ///ㅠ

+ 하지만 연수아란은 리버시블 안됩니다...22222 (?


▶ 피드백은 트위터 @trickste_r 또는 애스크 https://ask.fm/rukaruka



글을 씁니다. | 트위터 @ruka_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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