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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아, 야옹아 ~12

1차 창작 BL






저녁이 되어도 세상은 훤했다. 하지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일 테다. 그래도 오늘은 비가 온 덕분인지 해가 기울 무렵이 되자 날은 더위는 한층 꺾였다. 이제 슬슬 장마 오려나. 창 너머를 천천히 올려다보면서 이찬은 생각했다. 하기야, 이젠 날씨가 바뀌어서 비도 제 마음대로라고 하더라만. 생각에 이찬은 픽 웃었다. 메뉴판이 펼쳐진 테이블 위를 흘깃거리다 이찬은 다시 습관처럼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시간은 이제 곧 7시였다. 둥그런 눈 끝이 장난스럽게 일그러졌다.


“하여튼 지효경씨, 일찍 오는 법이 없죠.”


하기야 뭐, 편히 오라고 한 건 나지만. 오후 5시쯤에 효경은 일이 생겨 늦을지도 모른다고, 미안하다면서 문자를 보내 왔었다. 왜, 라고 되묻던 이찬의 답신에 효경은 짧게만 대답했다. 그냥. 그냥이 아니라는 것도, 효경이 말을 돌리고 있다는 것도 이찬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북촌에 다녀왔겠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화백의 갤러리에서 호랑이 그림을 좀 둘러봤겠고,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졌겠고, 그래서 잠들었겠고, 눈 떠보니 폐관할 시간이었겠고. 그 옷차림 그대로 갈 수는 없을 테니 오던 길에 종로에 들러 쇼핑을 했겠지. 문자는 이동하던 버스 안에서 보냈을 것이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찬은 답신은 짧게 했다. 그래, 천천히 와라.

어차피 늦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핸드폰을 다시 테이블 위로 툭 내려놓으며 이찬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냥 앉아 있기가 눈치 보여서 주문했었던 생맥주는 지금이 벌써 세 잔째였고, 그나마도 절반이 비었다. 그래도 이찬은 딱히 안달을 내지는 않았다. 때 되면 오겠지. 생각을 짧게 삼키고, 이찬은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담배를 물었다. 재떨이에 쌓여있던 꽁초는 꼭 열 대였다. 열한 대 째를 막 물었을 때 문이 열렸다. 이찬은 딱히 문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걸음 소리부터 익숙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이찬이 빈 담배 끝을 질근 물면서 생각했다. 홀을 가로지르는 걸음은 짧고 급했다. 긴 눈꼬리 끝은 곤란한 듯 구겨놓고 입술은 질끈 물고 있겠지. 넌 미안한 게 있으면 늘 먼저 선수를 치니까.

맞은편 자리에 누군가 앉은 것과 함께 걸음 소리가 멈췄다. 그제야 이찬이 빈 담배를 입에서 끄집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소매를 롤업한 티셔츠의 한 가운데에 큼직하게 박혀 있던 여우의 팝한 일러스트보다도 이찬은 그 하얀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긴 눈꼬리가, 역시나 예상대로, 스르륵 곤란한 듯 일그러졌다. 평소보단 기가 죽은 목소리로 효경이 우물거렸다. 미안. 이찬이 답 대신 피식 웃었다. 오늘도 빙고였다.


“그렇지. 지각을 안 하면 지효경이 아니라니까.”

“미안, 진짜 미안. 아, 오늘은 정말 일찍 오려고 했는데―”

“했는데?”

“자꾸 아저씨들 신는 등산화 앞을 못 떠나잖아. 이거 되게 편하겠다고, 그 구린 걸 굳이 사야겠다고, 그 멍청이가!…”

“누가.”


가방을 끌어 내리면서 툴툴거리고 있던 효경이 일순 우뚝 멈췄다. 굳이 속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효경의 온 얼굴이 이미 대답을 했다. 반응이 너무 솔직해서 이찬은 약간 기분이 썼다. 빤하지. 이찬이 물잔을 제 앞으로 슥 끌어당기면서 소리없이 생각을 삼켰다. 알면서 일부러 물었다. 효경이 다시 눈 끝을 스르륵 접었다. 말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지효경의 말이 빨라지는 순간이 언제인지를 이찬은 오래 전부터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어? 아, 어! 그게! 그러니까! 아, 말했잖아. 그 자식, 그거! 사촌동생! 아니, 이게 건방지게 어디에서 돈이 생겼다잖아. 그러니까 쇼핑을 해야한다나, 뭐라나. 갑자기 관광 잘 하다가 자기도 옷 사야한다고 갑자기 종로에 가자고, 무슨…”

“사촌?”

“어! 아까 그… 아침에! 걔 있잖아, 그 사촌.”

“아, 내 전화 대신 받은…”


하마터면 새끼라고 부를 뻔 했다. 말꼬리를 흐리는 걸 효경은 딱히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 걔! 걔라니까, 걔. 효경의 목소리가 반 톤 정도 높아졌다. 얇은 입매를 삐죽거리면서 효경은 이젠 그 사촌의 흠을 잡기 시작했다. 그래도 길게 놓인 눈꼬리는 둥그렇게 웃고 있었다. 물잔을 잡고 있던 이찬의 손가락 끝에 꾸욱 힘이 실렸다. 효경이 스르륵 웃으면서 툭 운을 뗐다. 진짜 웃기지도 않는다니까, 그게.


“걔 있어서 지금 죽겠다니까. 난 혼자 지내는 게 좋은데 누가 있으니까, 어우. 그래도 뭐 어쩌겠어? 나 있는데 아니면 갈 데도 없다는데. 귀찮아 죽겠다니까.”

“……”

“그래도 뭐 어쩌겠어. 갈 데도 없다는데. 당분간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지. 그러니까 왜 갑자기 군식구가 생겨서…”


얇은 입매는 쉼없이 툴툴거렸다. 이찬은 답 없이 효경을 가만히 쳐다봤다. 말과 표정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 지금 웃고 있어. 그런 말을 이찬은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말하기 싫어서, 알려주기 싫어서. 그 ‘동생’ 얘길 하고 있는 네가 너무 예쁘게 웃어서.

효경은 오래지 않아 애매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 몰라, 배고파. 손을 휘저으면서 그제야 효경이 메뉴판을 제 앞으로 끌어 당겼다. 뭐 시켰어? 효경이 물었고, 이찬이 짧게 대답했다. 아직. 효경이 메뉴판을 펼치면서 흐 웃었다. 안주부터 고른다면서 메뉴판을 스르륵 훑어보는 얼굴을 이찬은 잠깐 소리 없이 쳐다봤다. 그러다 무심히 불렀다. 효경아. 여전히 메뉴판에 눈을 묻은 채로 효경이 대답했다. 응?


“지호율이라면서.”

“어? 아, 어어. 야, 사촌이니까 당연히 성도 나랑 같…”

“너희 아버지 외동이시라며.”


메뉴판을 보고 있던 어깨가 순간 움찔 했다. 그 미묘한 기척을 이찬은 똑똑히 봤다. 효경은 대답이 없었다. 그보다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생각지도 못 했다. 그러게. 생각을 삼키며 효경이 제 입술을 질끈 씹었다. 우리 아버지 외동인데. 생각하자 하얀 귀가 순간 달아올랐다. 망했다.

어떡하지. 알아차렸을까, 거짓말인 거? 생각을 삼키며 효경은 눈치를 보듯 슥 눈을 들었다. 알았을까? 아닌데, 해이찬 눈치 더럽게 없는데. 눈치가 빠른 건 저쪽보단 이쪽이다. 눈치 없고, 둔하고, 어딘지 모르게 현실 감각이 무딘 거야 해이찬보다는 주은호 특기라지만 해이찬도 그렇게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효경이 아는 해이찬은 그랬다. 눈치가 빠르다면 내가 저한테만 유난히 짜증이 많은 걸 몰랐을 리가 없어. 나라면 그랬을 테니까. 그러면서 또 동시에 효경의 기분이 우울할 때마다 귀신 같이 나타나 장난을 거는 것도 해이찬이었다. 그게 효경은 늘 신기했다. 그래서 하필 저런 걸 좋아하게 된 거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찬은 더는 문제의 사촌에 대해 묻지 않았다. 메뉴를 골랐냐고 물었고, 효경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벨을 눌렀다. 주문은 이찬이 했다. 알바생이 새 맥주잔과 이찬의 맥주잔을 새로 채워 들고 왔고, 둘은 가볍게 건배를 했다. 날씨 탓인지 맥주는 유난히 시원하고 맛있었다. 화제는 이미 완전히 다른 쪽을 향해 돌아가 있었다.


“연애도 은근히 스트레스 받는 일이라니까. 매일 연락해야하지, 알아 가야하지, 참아야하지, 기다려야 하지. 남 좋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쁘자고 사귈 거랄 때는 언제고.”

“허, 우리 이쁜이. 또 오빠한테 츤츤거리지. 예쁜 것도 한 순간이야.”


연애는 얼굴이 다가 아니에요. 덧붙이며 이찬이 맥주를 쭉 들이켰다. 효경이 기가 찬 듯 픽 웃었다. 예쁘다고 사귀는 건 늘 너잖아. 이찬은 늘 연애가 쉬웠다. 지켜본 바로는 그랬다. 쉽게 사귀고, 잘 지내다, 또 쉽게 헤어졌다. 그리고 또 쉽게 만난다. 이번엔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지낼지는 모르겠지만. 이틀은 버티려나. 또 내일이면 소개팅 잡혔다고 메시지 보내겠지. 그게 해이찬이다. 알면서도 효경은 어쩐지 속이 쉽게 꼬였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술을 마신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지효경이랑 술 엄청 오랜만에 마시네. 요새 오빠랑 자꾸 내외하고 말이야.”

“내외는 무슨, 또 지랄하고 자빠졌네.”

“허, 또 예쁜 입으로 그런 못된 소리 한다.”

“그냥 나가 죽어라, 어?”


팝콘이 냅다 이찬의 얼굴로 날아왔다. 그래도 이찬은 낄낄 좋다고 웃었다. 오기 전에 이미 마시고 있던 탓인지 이찬의 얼굴은 이미 꽤 불긋불긋 했다. 그래도 효경이나 이찬이나 주량이 약한 타입들은 아니었다. 적당히 즐길만큼 마실 정도는 됐다. 하기야. 세상 그 누구가 주은호만큼 술을 못 마시겠나 싶지만.

잔은 금세 비었다. 대화는 사소했다. 방학 때 뭘 할 거느냐는 질문에 이찬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등받이에 툭 미끄러졌다. 여자친구랑 제주도 가는 게 목표였는데. 그 말에 효경이 대놓고 고소해했다. 그것 참 쌤통이라는 효경의 말에 이찬이 둥그런 눈을 접어가며 슬슬 장난의 시동을 걸었다. 이쁜아, 오빠랑 제주도 갈까? 자고로 신혼여행은 섬으로 가야하는 법이라며 한 마디를 더 했다가 이찬은 기어이 냅킨통에 한 대 맞았다.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이찬은 한참동안 낄낄거렸다. 그러다 불쑥 물음표가 이쪽을 향해 돌아왔다. 너는? 이찬이 물었다. 효경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뭘?


“넌 방학인데 뭐 안 하냐고.”

“나? 나야 당연히 대구 내려가 봐야…”


말꼬리가 우물우물 흐려졌다. 잊고 있던 얼굴이 떠올라서 그랬다. 그 야옹이.

오늘 약속장소에 생각보다 더 늦게 도착했던 건 순전히 호율이 자신을 붙잡고 늘어졌던 탓이었다. 약속이 있다고 이미 몇 번이나 고지를 시켜줬는데도 그 야옹이는 그새 다 까먹은 모양이었다. 어딜 가냐, 가지 마라며 막무가내로 붙잡고 늘어지다 슬슬 효경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녀석은 아양을 부리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지효경이 없으면 난 너무 심심하고, 혼자 옷도 못 입고, 캔도 따지 못한다는 소리를 하며 스르륵 팔짱을 껴오다가 호율은 끝내 길 한 복판에서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다른 건 다 봐줘도 거짓말은 못 봐준다. 캔을 못 따기는 무슨, 내 찬장은 그럼 누가 털었는데. 집요정이 털어갔니? 그래도 효경은 끝까지 모질지는 못 했다. 풀이 잔뜩 죽은 황금색 눈동자가 왠지 마음이 쓰여서 효경은 슬그머니 그렇게 덧붙였다. 일찍 갈게. 그제야 호율은 효경을 풀어줬다. 일찍 온다는 그 한 마디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호율은 효경에게 슥 새끼손가락을 걸어왔다. 그리곤 여름날 바람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약속했어요, 꼭. 나 들어올 때까지 계속 안 자고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근데 그걸 두고 대구 집엘 내려간다니. 효경이 울컥 눈을 좁혔다. 머리가 절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며칠씩이나 놓고 간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자리 비운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렇다고 데리고 가자니 엄마한테 이 아이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일이 자신이 없었다. 거짓말은 해이찬한테도 이미 충분히 했다. 이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 아프고 소질도 없으니까.

이찬이 잠깐 효경을 가만히 쳐다봤다. 하얀 얼굴은 저 혼자 바빴다. 고민했다, 짜증냈다, 골치가 아픈지 일그러뜨렸다를 반복하며 아주 분주했다. 그 이유를 묻는 대신 이찬은 잠자코 효경의 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효경이 얼떨결에 맞건배를 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이찬이 젖은 입가를 쓸면서 말했다. 안동 갈래?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보다는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언젠 제주도 가자더니?”

“제주도를 왜 너랑 가냐, 인마. 농담이지. 그런덴 애인이랑 가는 거야, 이쁜아.”

“……”

“그냥, 우리 본가가 안동이거든. 너 대구 가면 올해는 잠깐 그쪽에서 만나자고 하려고 그랬지.”

“너 서울이 고향이라면서… 아니, 그것보다 안동에는 왜.”

“아, 집안 제사 있어서.”


꼬리가 긴 갈색 눈이 일순 크게 열렸다. 제에사아? 되받아친 말에 이찬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 제사. 효경이 입을 떡 벌렸다. 제사라니.


“…너랑 진짜 안 어울린다.”

“허, 또 그런다. 이래 뵈도 종가집 본가 종손이거든요.”

“대박. 종손이라고?”

“어, 우리 아버지는 둘째지만. 큰 아버지가 딸만 둘이거든.”

“그럼 갓도 쓰고 그래? 제사 세게 드리는 집들은 그렇게 하던데.”

“갓…까지는 아니지만 무슨 이상한 옷 입기는 하지. 지방도 쓰고, 향도 피우고, 절도 아주 허리가 부러지도록 하고, 씨발.”

“…고생이겠다.”

“뭐, 내가 고생이겠냐. 우리 어머니가 고생이시지. 이런 집에 시집 오셔서 명절에 쉬지도 못하고, 맘고생은 맘고생대로 하시고. 하필 아들이 단군…”


우물거리다 이찬이 불현듯 말을 멈췄다. 단군? 효경이 눈을 좁히면서 물었다. 이찬이 볼 안쪽을 소리 없이 짓씹었다. 취했냐, 해이찬. 이제까지 잘 참아놓고 왜 이래. 지효경이랑 술 처음 마시는 것도 아니면서. 혀끝까지 치미는 말을 잠자코 짓누르면서 이찬은 잔을 꺾으며 남은 맥주를 들이부었다. 알바생이 잽싸게 다가와 빈 잔을 치웠다. 이찬이 마른세수를 하며 의자의 등받이에 깊게 기대앉았다. 볼이 홧홧했다. 아무래도 좀 취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냥, 내 생일이 단군이 나라 만든 날이라고.”

“그러게. 너 개천절이 생일이잖아.”

“아, 얘랑 잘 됐으면 그때쯤이 딱 100일일 텐데.”

“그 기념으로 같이 제주도 가시고?”

“어. 어떻게 알았냐? 역시 우리 이쁜이, 오빠 많이 좋아하는구나. 짜식.”

“……”

“아, 장가가고 싶다.”


연애 그딴 거 다 부질없어. 이찬이 불콰해진 제 얼굴을 연거푸 손으로 쓸었다. 충혈기가 올라오기 시작한 눈길이 효경을 불렀다. 효경아. 그 짧은 한 마디에 가슴엔 간단히 실금이 간다. 부르지마. 그런 눈으로 웃지마. 나는 이미 네가 의미 없이 박아 넣은 말들로 상처가 너무 많은데, 네가 그어놓은 실금들이 이젠 너무 많은데, 누군가 손끝으로 툭 치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데. 대답을 하는 대신 효경은 잔을 꺾으며 남은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속이 상해 그랬다. 가슴이 찢기는 것 같아 그랬었다. 울 것 같아 그랬어, 나는.

결국 또 저런 소리를 하는 네가 난 너무 미워서.

그런데도 나는 네가 너무, 좋아서.


“아, 진짜… 너무 힘들고 괴롭지 않냐. 연애라는 게.”

“……”

“누굴 좋아한다는 게…”


그 말에는 정말로 대답을 하고 싶었다. 어, 그러게. 왜 그렇게 힘들까. 누굴 좋아한다는 게.

단숨에 잔이 비었다. 동시에 뺨은 빠르게 달아올랐다. 눈치 빠른 종업원이 잔을 다시 채우러 간 사이에 효경은 열이 오른 제 뺨을 느리게 쓸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게 술 탓인지, 아니면 다른 때문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알아도 알고 싶지 않아서 효경은 일부러 이찬을 쳐다보지 않았다. 이찬은 계속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알아, 네 기분이 뭔지. 너는 그냥 하소연을 하고 싶은 거지. 이런 패턴은 익숙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여자랑 헤어졌다고, 서글프니 위로해달라고, 오늘 술이나 같이 마시자고 말했던 건 이찬이었다. 그래, 늘 이랬다. 너는 늘 이렇게 털지. 나를 붙잡고 술을 마시고 취하고, 연애가 어떻고 사랑이 어떻다면서 장황설을 늘어놓다 또 며칠 뒤면 후련해져서는 다시 새 인연을 찾으러 사라져 버린다. 이런 건 익숙하다. 따지고 보면 해이찬이 연애를 하지 않은 적이 대체 얼마나 있었다고. 늘 그랬다. 늘 그랬다는 걸 알면서도 늘 서운했다. 그게 이따금씩 효경은 억울했다. 이 정도나 됐으면 포기를 할만도 한데 왜 포기를 안 하는데, 나는. 왜 저런 걸 계속 붙잡고 있는데, 나란 등신은.

알바생이 다시 맥주를 채워 돌아왔다. 빌지를 새로 쓰고 알바생이 사라질 때까지도 이찬은 계속 같은 자세였다. 잔뜩 붉어져선 자꾸 부슬부슬 실없이 이쪽을 빤히 보며 웃기나 했다. 분명히 취했다. 하지만 효경이 아는 이찬은 이 정도로 주량이 약하진 않았다. 그것조차 효경은 속이 상했다. 왜 헤어졌는데. 그렇게 힘들어할 거면 넌 대체 왜 헤어졌는데.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어서 효경은 맥주만 말없이 들이켰다. 이찬이 등받이에 툭 머리를 기대며 주정처럼 우물거렸다. 연애, 씨발, 그딴 거 왜해. 어차피 좋아하는 사람이랑 사귀지도 못하는데.


“누가 그러더라. 그래서 사랑이 기적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나와 같은 마음으로 좋아해주는 확률은 우리 생각보다 높지가 않다고. 그래서 기적이라고. 천만 분의 일, 억만 분의 일의 확률을 뚫는 것과 같다고. 하기야, 뭐. 우린 태어날 때부터 기적이지. 몇 억개의 정자를 제치고 생명이 됐냐고, 우린. 아, 좀… 취했나. 별 소릴 다하네, 씨발.”

“……”

“그러니까 그냥, 이 사람이다 싶으면 나는 장가가려고. 정말로 좋은 남편으로 살려고, 나는. 제사 그딴 거… 나 장가 가면 다 확 줄여버리든지 해야지. 우리 와이프 고생하면 안 되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생하면 속상하잖아.”

“……”

“내가 정말 많이 아껴줘야지. 많이 사랑해주고, 많이 고마워하고… 나 같은 놈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나한테 와줘서 고맙다고… 매일 내가 업고 다닐 거다, 씨발.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우리 닮은 자식도 낳고, 자식 커가는 모습도 보고, 같이 늙어 가고, 그러다 비슷한 때에 같이 떠나고…”

“……”

“아, 우리 재학 중에 결혼해도 안 잘리지?”


효경이 헛웃었다. 기가 막혔다. 저런 소리를 농담이라고 하고 있다, 저 개 같은 새끼가. 눈가가 자꾸만 시큰거렸다. 코끝이 자꾸만 근질거렸다. 가슴에 걸린 돌들이 자꾸만 덜그럭거렸다. 귀라도 틀어막고 싶었다. 시끄러워. 효경이 울컥 눈을 좁히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진짜, 시끄러워. 가슴 속에서 자꾸만 파도가 쳤다. 자꾸만 넘실거렸다.

어떡하지. 효경이 이찬을 돌아보며 입술 끝을 가만히 짓씹었다. 오늘은 자신이 없어. 참을 자신, 숨길 자신, 괜찮을 자신.


“그러니까, 할 수 있으면 되도록 일찍 해야지. 이 사람이다 싶으면 질러야 된다는 말이 맞다니까. 한 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안 온다고, 허… 생각해보니까 존나 맞는 말이네.”

“……”

“애는 딸이면 좋겠다. 오빠 애 되게 잘본다, 이쁜아. 내 여동생 내가 키웠다니까. 내 동생도 참 어릴 땐 예뻤지. 오빠 말도 잘 듣고… 그래. 딸. 와이프 닮은 딸이면 좋겠…”

“…지마.”


횡설수설 이어지던 말꼬리가 우물우물 사라졌다. 이찬이 눈을 좁히며 되물었다. 뭐? 효경이 입술을 꽉 물었다 놓았다. 잡지 못한 말이 끝내 입술 틈을 비집었다. 하지마.


“결혼 같은 거 하지마. 연애도 하지마.”

“어? 이쁜아,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싫어.”

“……”

“내가 싫다고, 개자식아.”

“……”

“내가, 너 좋아해서, 싫다고.”


아, 진짜. 갈색 눈이 프 웃었다. 웃음결을 따라 고여 있던 것들이 하얀 뺨 위로 툭 굴러 떨어졌다. 그래도 효경은 닦지 않았다. 자꾸 실없이 웃음이 났다. 이찬이 허리를 들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둥그런 눈이 의아한 듯 크게 열렸다. 찬물이라도 한 양동이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효경은 심장이 철렁했다. 끝났다. 자꾸만 뺨이 젖었다. 미쳤어. 미쳤구나, 지효경. 너 어쩌자고 이래. 지금까지 잘 참아놓고 왜 이 잠깐을 못 참아, 이 등신아.

진짜 끝났어. 머릿속이 온통 복잡했다. 혼란스러웠다. 생각보다 손이 더 먼저 가방끈을 움켜잡았다. 갈게. 말하면서 효경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찬은 아직도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왜? 효경이 이찬을 힘껏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니 여자친구들을 질투할 정도로 내가 널, 좋아하니까.”

“……”

“한 번만 더 연애문제로 연락하면 진짜 죽여 버릴 거야. 개자식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차마 닦지도 못 했다. 이젠 헛웃음조차 나질 않았다. 왜 하필 너였을까. 너만 아니었다면 나는 좀 행복했을까.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걸어볼 수 있었을까. 그래서 평범하게 행복할 수 있었을까. 만약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네가 아니라 주은호였다면, 차라리 호율이었다면. 근데 그러질 못 했다. 그게 가장 큰 실수였다. 등신 같이, 포기를 못 했어. 계속.

괜찮아, 이젠 안 볼 거니까. 못 볼 테니까. 생각을 삼키며 효경은 돌아섰다. 그와 동시였다. 손목이 잡혔다. 잡힌 힘을 따라 시선이 떨어졌다. 눈이 마주쳤다. 이찬은 말이 없었다. 술은 이미 다 깬 듯 했다. 둥그런 눈이 혼란처럼 흔들거렸다. 그러다 천천히 웃었다. 난감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허, 어쩌지.”

“……”

“남자랑 사귀는 취미는 없는데.”


효경이 입술을 질근 씹었다. 말 안 해도 알아, 그딴 거. 그리고 아마 입장을 바꿔본다면 자신도 똑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1년이 넘도록 친구 흉내를 내고 있던 단짝이 대뜸 좋아한다니, 나라도 싫을 거야. 이찬은 한참 대답을 헤매는 듯 했다. 볼을 긁적거리다 이찬은 잡힌 손목을 제 쪽으로 스르륵 끌어 당겼다. 일단 앉자. 앉아서 얘기하자. 어? 팔을 떨칠까 하다 효경은 못 이기는 척 이찬의 옆에 앉았다. 이것조차도 익숙했다. 생각해보면 늘 이랬다. 화를 내는 것도, 속이 상하는 것도 늘 제 쪽이다. 동시에 마음이 풀어져 버리는 것도 언제나 제 쪽이었다.


“너는 왜 울고 그래. 사람 놀라게.”


둥그런 눈꼬리를 떨어뜨리면서 이찬이 슥 효경의 뺨을 문질러 닦았다. 효경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손을 쳐내지도 못 했다. 쳐 내기엔 그 손이 너무 크고 따뜻했던 탓이었다. 스르륵 문질러 닦아주면서 이찬이 다시 효경을 바라봤다. 어쩐지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어, 너 혹시… 그러니까 남자가 좋다거나, 게이였다거나…”

“미쳤… 아니거든?!”

“근데 왜 내가 좋다고 그러지. 이상하네.”


너라서 그런 거야. 너니까 그런 거잖아. 몇 번이고 치밀어 오르는 말을 효경은 간신히 참아냈다. 다시 눈가가 부옇게 젖기 시작했다. 막힌 둑이 터진 것만 같았다. 왜 또 울어, 인마. 농담처럼 달래던 갈색 눈이 둥그렇게 휘어졌다. 엄지로 젖은 속눈썹을 스르륵 닦아낼 때 눈이 마주쳤다. 이찬의 얼굴은 다소 복잡했다.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난감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천천히 이름이 불렸다. 이번에도 애칭은 아니었다. 효경아. 반 톤 정도 낮아진 목소리가 조용히 덧붙였다.


“키스해볼까.”


흠뻑 젖어 있던 갈색 눈이 둥그렇게 열렸다. 듣고도 믿기지가 않아 그랬다. 어이가 없었다. 가슴에 걸린 돌들처럼 덜그럭거리면서 효경은 가까스로 되물었다.


“…뭐?”

“키스 한 번 해보자고. 딱히 네 얼굴이 싫은 것도 아니고, 내가 그런 취향은 아니지만 그냥 뭐… 키스해보면 알겠지. 너랑 연애할 수 있는지, 없는지.”

“……”

“키스하자, 효경아.”


너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나쁜 새끼야. 그런 말을 하는 대신 효경은 이찬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망설이지도 않고 입술을 겹쳤다. 반은 오기로 그랬다. 나머지 반은… 모르겠다. 이찬의 눈이 잠깐 크게 열렸다, 이내 효경의 뺨을 움켜잡으며 숨을 섞었다. 키스는 오래지 않아 깊어졌다. 누군가 둘을 보고 술렁거렸던 것도 같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급하게 부딪친 입술에선 담배 냄새, 그리고 술냄새가 옅게 났다. 달았고, 깊었고, 썼다. 키스처럼.

틈 없이 맞붙었던 두 입술은 한참 후에야 스르륵 떨어졌다. 이찬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젖어 있던 하얀 뺨을 이찬은 손등으로 천천히 훔쳤다. 웃음도 표정도 없는 얼굴로 이찬은 낮게 말했다. 역시.


“별로네. 남자랑 키스하는 거.”

“…넌 진짜 개새끼야.”

“어. 개새끼야. 내가 제일 못 됐거든.”

“……”

“그러니까 나 좋아하지 마라. 괜히 맘고생 하지 말고.”


그 말에 기어이 울음이 터졌다. 품으로 와르르 쏟아지던 효경을 이찬은 말없이 끌어안았다. 안긴 채로 효경은 잡아줄 손을 잃을 아이처럼 울었다. 품에 안긴 효경의 머리칼을 말없이 헤집어주며 이찬은 아득히 눈을 감았다. 심장소리에 귀가 먹을 것 같았다. 그보다 너무 아팠다. 하지만 이찬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긴 어둠 위로 카브리올레가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주변을 까맣게 채운 어둠만큼 차 안에서는 어떤 살가운 대화도 없었다. 라디오조차 틀지 않았다. 먹먹하게 어두운 창 너머를 바라보면서 은호는 느긋하게 시트에 등을 기댔다. 오디오에 찍힌 시계는 막 10시를 넘어 가리키고 있었다. 침묵이 바람처럼 실내를 가득 메웠다. 바람을 깬 것은 정민이었다. 룸미러 너머로 흘깃 은호를 돌아보며 정민이 고요히 운을 뗐다.


“어떻게 할 생각하십니까.”


은호는 대답이 없었다. 정민은 잠시 텀을 두고 대답을 기다렸지만 뒷좌석에서는 아무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진갈색 눈동자가 고요하게 웃었다. 다시 정민이 말을 이었다. 본인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듯한 투였다.


“차라리 잘 된 일이겠지요. 곁에 있으니 공을 들여 찾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도련님.”

“……”

“설마 내키지 않은 건 아니시겠지요.”


이번에도 딱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은호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바깥은 컴컴하게 어두웠다. 하늘이 흐린 탓인지 달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빛이 사라진 세상은 그저 한 덩어리 같다. 명확한 구분도, 경계도 없다. 때문에 그 어둠을 은호는 도리어 좋아했었다. 낮보다는 밤이 좋았다. 밤이 되면 경계가 흐려진다. 경계가 흐려지면 선을 긋지 않아도 된다. 상대를 구분하기 위해 촉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우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 적인지, 아군인지. 나를 살릴 자인지, 나를 죽일 자인지. 하여 그런 말이 있었던가.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밤을 알아야 한다고.

부드럽게 미끄러져 지나치는 어둠을 은호는 묵묵히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운을 뗐다. 정민의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어렸을 때 딱 한 번 ‘하늘’사당의 문 앞까지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실장님이 저를 데려가주셨었지요. 기억하십니까.”


정민이 허허롭게 웃었다. 오랜 추억을 되짚는 듯 아련한 눈길로 정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기억합니다.


“그때가 봄이었던가요. 사모님께 많이 혼이 났었지요. 어찌 순혈들만 오르는 귀한 사당에 데리고 갔느냐고요. 사모님께서는 아마 도련님이 혹 트집을 잡힐까봐 그러셨을 겁니다. 순혈파 장로들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천지에서 쫓겨났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그때 제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글쎄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었나요?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서, 하하.”

“호장(虎長).”


허허롭게 웃고 있던 정민의 눈이 우뚝 굳었다. 실장이 아니라 그 호칭을 불린 탓이었다. 여전히 표정이 없는 얼굴로 은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바람소리가 어둠처럼 날카롭게 울었다.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호장께서 저에게 그렇게 말씀 하셨었지요. 하늘을 얻는 것은 저라고, 제가 하늘을 얻게 될 것이라고. 그리하여 바라던대로 하늘에 올라 세상을 호령하게 될 것이라고.”

“……”

“허나 하늘을 여는 것은 제가 아니라고.”


정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 좋은 얼굴이 안경 속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웃었다. 저는 통, 기억나질 않는군요. 하지만 은호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체적으로 늘 선명했다. 그때는 지금과 상황도 많이 달랐었다. 정민이 지금처럼 자신을 돕고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정민의 곁에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아이가 늘 함께 있었다. 꽤 오랜 세월동안 정을 나누었다던 친우의 아들, 상서로움과 불길함을 함께 안고 태어났다던 아이, 그리하여 어머니 곁을 따르던 장로들에게 늘 핍박을 받던 그 아이가 정민과 함께였었다. 정민은 그 아이에게 글과 역사와 노래와 옛 이야기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정민이 ‘하늘’을 보여준 것은 그 아이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언제나 그 점이 불편했다. 그 때문에 은호는 이 자가 늘 껄끄러웠다. 속내도, 의도도, 의미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어머니가 이 자를 신뢰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한정민을 신뢰한다. 어머니는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다. 오래 전에 숨을 거둔 아버지도, 자신들의 편에 서서 수족이라도 잘라 바칠 것처럼 아부하는 장로들도, 심지어 자신의 친부인 최고 장로마저 믿지 않았다. 제 아들에게도 천박한 피, 더러운 피라 손가락질 하는 어머니가 유일하게 믿는 것이 한정민였다. 어머니는 모든 일을 정민과 상의했다. 집무를 할 때에도, 또 천지의 가장 높은 궁에서 족장 업무를 대리할 때에도. 그리고 자신을 이 한반도의 남쪽으로 쫓아내듯 보냈을 때에도.

어차피 감시역이다. 은호도 그 점은 알고 있었다. 한정민은 어머니의 눈이자 수족이다. 하지만 은호는 분명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어린 날, 정민이 자신에게 했던 그 말을.

정민은 별 반응이 없었다. 여전한 얼굴이 허허롭게 웃었다. 완만하게 꺾인 커브길에서 부드럽게 핸들링을 하면서 정민은 덤덤히 입을 열었다. 전과 다름없이 온화한 목소리였다.


“글쎄요. 저는 일단 도련님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호장.”

“말씀 드렸을 텐데요. 당신이 하늘을 가질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 거라고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에게 하늘을 주겠다고, 하늘을 가지게 해주겠다고. 족장으로 만들어드리겠노라고.”

“……”

“하지만 하늘을 여는 건 당신이 아니지. 그 아이를 가지는 게 당신이 아니니까.”

“……”

“분해?”


돌연 하대였다. 은호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지금이 낮이었다면 아마 드물게 질린 얼굴이 보였을 지도 모른다. 정민은 개의치 않았다. 룸미러에 비친 갈색 눈이 일순 차가워졌다. 갈색 눈이 순식간에 색을 바꿨다. 가면을 걷어내듯 스르륵 사라진 맹안 너머에서 ‘진짜’ 눈이 은호를 돌아보았다. 천지처럼 깊고 시퍼런 눈동자였다. 눈이 드러난 것과 동시에 공기가 변했다. 공기가 온 사방을 짓누를 듯 조여 왔다. 압기(壓氣)다. 생각하며 은호가 기척 없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파란 눈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어리석고 가여운 존재 같으니.


“세상은 모두 힘에 굴복하는 거야. 네 것이 아니면 네 것으로 만들면 되지. 마음을 안 주면 앗아. 열리지 않으면 부수어 열어. 이렇게 전력으로 돕고 있는데, 족장이 되지 못하면 나는 곤란하거든.”

“……”

“너는 너무 마음이 약해, 어린 도련님.”


정말로. 덧붙이며 정민이 웃었다. 휘어진 눈이 다시 열릴 때 파란 빛은 이미 사라지고 본래의 갈색 눈으로 돌아가 있었다. 팽팽했던 공기가 스르륵 풀어졌다. 언제나처럼 해사하게 웃으면서 정민이 잠깐 룸미러 너머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결례를 범했습니다만, 도련님.


“말의 뜻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도련님은 언제나 성실하셨으니까요.”

“……”

“당신이 하늘을 가지는 것. 또 당신이 하늘을 열지 못하는 것. 하늘을 여는 것은 당신을 위한 섭리가 아닙니다, 도련님. 하지만 섭리라는 것은 본래 이긴 자를 위한 변명입니다. 이기면 모두 섭리가 되는 법이죠.”

“……”

“정신을 똑바로 차리셔야 할 겁니다.”


은호가 우물거리다 이내 다시 입을 닫았다. 차는 다시 깊은 어둠 속을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달조차 사라져버린 어둠, 깊은 밤이었다.



(계속)







또 이렇게 1주일만에 뵙습니다ㅜ_ㅜ 기다려주신 분들, 또 읽어주시는 분들 늘 감사합니다. 일단 저는 퇴근부터..... 좀 전까지 주변에 야근하는 분들이 많으셨는데 지금은 한 분도 안 계시네요. 어둠이 무섭습니다..


+

아주 사소한 이야기지만 야옹이의 시간적 배경은 2010년입니다. 호프집에서 아직 담배를 필 수 있었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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