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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아, 야옹아 ~11

1차 창작 BL






여섯 살, 그 해는 아이에게 너무나도 가혹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여보.」

「이러다 애가 정말 죽는다구요-!」



아이는, 이찬은 아직도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침대 곁에서 엄마는 아빠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엄마, 그만 싸워, 머리 울려. 이찬은 몇 번이고 중얼거렸지만 목소리는 나지 않았다. 머리는 타는 듯이 뜨거웠고, 말은커녕 눈을 뜰 힘조차 없었다. 모든 게 희미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며칠인지, 낮인지 밤인지, 나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엄마의 울음이, 아빠의 한숨이 이찬에겐 모두 먼 꿈처럼 느껴졌다. 이찬은 그저 잤다. 자다가, 깨다가 혹은 앓다가 지쳐 또 잠들기를 반복했다. 꼭 두 살이 더 어렸던 여동생은 잠든 오빠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오빠 아파? 마이 아파? 어린 딸이 물어볼 때마다 엄마는 큰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소리 없이 울었다.



「이찬아, 괜찮니? 응? 우리 아들, 우리 아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찬은 건강했다. 워낙 활발하고 호기심이 많아 매일 온 동네를 휘저으며 놀던 아이였다. 이찬 곁엔 늘 친구가 많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이찬은 해가 뜰 때부터 저물 무렵까지 골목을 뛰어 다니면서 놀았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막 가을에 접어들기 시작했던 그 무렵은 참 선선했고 해가 높았다. 이찬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이터에서 야구를 했다. 제 몸에는 무거웠던 알루미늄 배트를 들고 낑낑 거리면서도 마냥 즐거웠다. 

친구가 던져준 테니스공에 이찬은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그 순간 하늘이 빙글 돌았다. 중력을 벗어난 몸이 허공 위에 붕 떠올랐을 때 지끈 열이 올랐다. 몸이 뜨거워. 이찬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놀이터의 모래구릉 위로 풀썩 쓰러졌다. 온몸이 불덩이였다. 겁을 먹고 울던 친구 하나가 이찬의 부모님을 불러올 때까지 이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이찬을 끌어안고 목이 쉬도록 울었다. 하지만 아빠도, 엄마도 이찬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당신 집안이 뭐가 그렇게 잘났고 대단한데. 해씨가 뭐가 그렇게 귀한 핏줄인데! 장손이 뭔데. 약속이 뭔데!」

「여보, 그만. 이찬엄마, 응? 이러다 당신이 쓰러지겠어.」

「놔. 당신이 사람이야? 제 정신이야? 당신 아버지가, 당신 어머니가 사람이냐고!」



이찬이 눈을 뜨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엄마와 아빠는 더 자주 싸웠다. 여동생이 울어도 달래줄 어른이 없었다. 엄마는 자주 울었다. 엄마, 울지 말아요, 난 괜찮아. 이찬은 그렇게 의젓하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의식이 깨어 있어도 몸은 깊이 잠에 빠져 있었다. 열이 높아지며 잠은 점점 더 늘었고, 현실마저 야금야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어느 것이 진짜고 어떤 것이 꿈인지 이찬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고함소리, 아빠의 한숨소리, 여동생의 우는 소리. 그리고 저 멀리에서 하얗게 손짓하고 있던 작고 예쁜 그림자.


꿈을 꾸면 언제나 같은 사람이 보였다. 제 또래의, 하얗고 예쁜 아이였다. 길게 놓인 눈꼬리가 이찬을 향해 함박 웃었다. 이찬은 꿈속의 그 아이가 여우를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예쁘다… 이찬은 꿈속에서 아이에게 종종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이는 그때마다 하얀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이고 괜히 이찬의 어깨를 작은 주먹으로 퍽 치고는 했다. 아이는 자주 웃었고, 웃는 얼굴이 예뻤다. 토라진 얼굴은 더 예뻤었다. 새침하게 눈을 흘기던 그 얼굴이 참 좋아서 이찬은 꿈속에서 아이에게 수시로 장난을 쳤다. 그래도 이찬이 가만히 손을 잡아당기면 못 이기는 척 끌려와주고는 했다. 이찬은 그 아이를 보는 게 참 좋았다. 꿈속에서 아이와 손을 잡고, 한 번도 가보지 못 했던 낯선 시골 마을의 길과 강둑을 달리는 게 좋았었다. 그래서 이찬은 깨고 싶지 않았었다. 영원히 아이와 꿈속에서 살고 싶었다.


열흘째가 되던 날, 꿈은 끝났다. 꿈속에서 아이가 손을 흔들며 이찬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또 만나. 


뒤를 돌아 달려가는 아이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 이찬은 잠에서 깼다.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처럼 침대는 식은땀에 흠뻑 젖었지만 열은 사라지고 없었다. 창에서는 아침햇살이 찬란히 쏟아져 내렸다.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 낯설어 이찬은 눈을 찡그렸다. 흐린 시야가 천천히 또렷해질 때에야 이찬은 비로소 방에 자기 혼자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없었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이찬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색이 밝은 긴 머리칼에 화사한 체구를 남자가 눈 끝을 접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남자의 눈은 태양처럼 찬란한 황금색이었다.



「꿈은 잘 꾸었느냐.」

「……」

「그 아이, 예쁘던?」



이찬이 멍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를 향해 샐쭉 눈을 흘기던 그 하얀 얼굴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고생 많았다. 말하며 남자가 이찬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빠와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눈을 뜬 아이를 보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으며 울었고, 아빠가 엄마의 등을 느리게 쓸어주었다. 여동생이 달려와 오빠에게 매달렸다. 오빠, 오빠! 오빠, 안 아파? 이제 아야 안 해? 이찬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혼란에 떨리는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남자는 말했다. 남자의 미소처럼 따뜻한 목소리였다. 아가.



「그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두렴. 네가 평생을 지켜야 할 사람이란다.」

「지켜야 할 사람? 평생요?」

「그래, 평생. 네가 그의 ‘운명’이기 때문이지.」



운명.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이찬이 얼굴을 찡그렸다. 열흘동안 열에 시달려 정신도 차리지 못했던 여섯 살 아이에게 운명이란 단어는 너무 어렵고 멀었다. 더 묻기도 전에 아빠의 부축을 받으면서 일어난 엄마가 와락 이찬을 끌어안았다. 수고했어, 우리 아들 정말 수고했어. 엄마가 왜 우는지, 그리고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이찬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남자가 가만히 이름을 불렀다. 이찬아. 엄마가 젖은 눈가를 문지르며 스르륵 팔을 풀며 잠시 곁으로 비켜주었다. 이찬의 작은 손을 잡으며 남자는 무릎을 굽혔다. 여섯 살 어린 아이에게 머리를 숙이며 남자는 말했다. 호령의 자손이 ‘하늘’과의 약조를 지키려고 합니다. 이찬이 일순 화들짝 놀라며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이찬이 제 가슴께를 꽉 짚었다.



「여기… 이상해요. 가슴이 쿵 했어요. 병 걸린 것처럼…」

「그래, 기이한 기분일 게야. 나도 책으로만 읽었지,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로구나. 허나 병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라. 네게 다른 힘이 생긴 거야. 다른 고귀한 힘이 너에게 생긴 것이란다. 세상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힘이지. 이제부터 네 가슴에 뛰는 것은 네 심장이 아니다.」

「……」

「그 심장을 지키기 위해 살아라. 단군의 아이야.」



그때, 가슴이 대답처럼 뛰었었다. 낯설고 먼 고동이었다.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운명처럼.

















끼익 긴 소리를 끌며 문이 열렸다. 맵시 좋은 손끝으로 문을 밀면서 호연은 안으로 들어섰다. 상석에 앉아 있던 이찬도, 그 곁에 앉아 있던 회산도 별로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방에는 그 둘뿐이었다. 허공중에는 낯이 익은 체취가 옅게 떠돌았다. 안으로 다가서며 호연이 입을 열었다. 의아한 얼굴이었다.



“우리 아들은…”

“갔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찬이 불쑥 대답했다. 말투부터 표정까지 뭐 하나 고운 것이 없었다. 괜히 앉은뱅이책상의 다리를 발끝으로 훅 떠밀면서 이찬은 불퉁거렸다. 어오, 진짜, 짜증나서. 회산의 유리알 같은 눈이 곤란한 듯 일그러졌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호연은 조금 전에 이곳에서 있었을 일들이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호율은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허공에 떠도는 체취가 바로 그 증거였다. 호족은 저마다 체취가 다르며, 그 체취를 통해 서로를 구분했다. 20년을 보지 못했다고는 하나 날 때부터 지켜봐온 제 아들의 체취를 호연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허니 호율은 분명히 여기에 있었을 것이고, 회산의 안내에 따라 이찬을 만났을 것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썩 좋게 끝나지는 않은 듯 했다. 이찬이 울컥 눈썹을 구겼다.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요, 할배. 나는 분명히 얘기했어요. 당신 아들이라도 허락해줄 생각 절대 없다고.”

“아가.”

“내가 이번만큼 핏줄에 감사한 것도 처음이에요. 단군의 아이가 뭐고, 하늘의 대리자가 다 뭔데. 그냥 직계 자손으로 태어난 것뿐이잖아.”



씨발. 툭 욕지기를 뱉다가 이찬이 슥 눈을 들어 호연의 얼굴을 살폈다. 웃음이 걸린 입가가 어쩐지 썼다. 그 얼굴에 이찬이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됐어요, 그런 얼굴 하지마요.



“그냥 화풀이 하고 있는 거니까. 아, 나는 할배가 그런 얼굴 하면 진짜, 미치겠더라. 미안해서.”

“……”

“나중에 찾아오라고 했어요. 걔 아직 맹안 쓸 레벨이 아니더만. 자기 도력이 어느 정도인 줄도 모른다니까, 허.”



그러고도 지금까지 용케 안 죽었다. 그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는 호연을 생각해서 그랬다. 그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호연은 그 이상 제 아들의 안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이찬이 저러는 이유의 8할은 전부 한 아이 때문이다. 이 집의 어느 방 한 곳에서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던 그 아이, 하얗고 예쁜 아이. 이찬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뜸 화제를 바꿨다. 기가 막히게도 딱 그 이야기였다.



“근데 효경이는요.”



호연이 대답을 하기 전에 회산이 스르륵 일어났다. 바깥을 둘러봐야겠노라며 회산은 자리를 나섰다. 열린 문이 잠시 열렸다 다시 닫혔다. 그제야 호연은 담담히 대답했다.



“화랑으로 다시 데려다 놓았다. 최면을 풀었으니 이제 한 식경 후면 깨어나겠지.”

“애한테는 손 대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호족들은 뭐만하면 최면에 염력이지.”

“아가. 그 아이와 마주치면 안 된다고 말한 건 네가 아니었더냐.”

“난 처음부터 여기 올 거라고도 안 했어요. 망할 호랑이 왕자가 맹안을 쓰건말건 나랑 뭔 상관인데.”



호연이 잠시 눈을 둥그렇게 열었다. 망할…? 호랑이 왕자? 그러다 이내 제 아들을 지칭하는 말임을 알고는 픕 웃어 버렸다. 호칭을 두고 예의를 따지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이찬을 지켜봐왔다. 자기감정에 솔직한 아이다. 동시에 너무 중한 것을 오랫동안 제 가슴 안에만 홀로 꽁꽁 묻어두고 있던 아이였다. 네 나름은 고민이 많겠지. 저 아이의 역할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단군의 아이라는 것, 그리고 하늘을 대리하는 대리자라는 것.

반만년 전부터 이어져온 약속이었다. 이찬의 까마득한 조상이 반도에 나라를 세우고 세를 떨칠 무렵부터 지금까지 약속은 충실히 이행 되어 왔을 것이다. 약속의 증거는 저 아이의 ‘핏줄’이다. 단군의 직계 후손 중에서도 적법한 장자만이 그 약속을 물려받아 단군의 아이로 불린다. 단군의 아이에게 중한 것은 오로지 ‘생명’ 뿐이다. ‘생명’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호족에게도, 인간이면서 인간에게도.



“할배, 나는 나중에 타임머신 같은 거 생기면 그거 타고 다섯 살 지효경 좀 만나러 가려구요. 그래서 뒷통수 딱 때리면서 그럴 거야. 그거 먹지 말라고, 절대로 먹지 말라고.”

“……”

“하기야, 뭐. 아니었으면 지효경 쫓아서 같은 학교까지 들어갔을 리도 없겠지만.”

“……”

“내가 나쁜 거죠.”



둥그런 눈이 프 쓰게 웃었다. 호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리고는 잠잠히 황금색 눈 끝을 접으며 웃었다. 그 눈만큼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따뜻했다.



“결과가 무엇이건 나는 언제나 네 뜻을 존중한단다, 아가. 헌데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엄연히 숨을 먹은 생명이 존재하는데 네가 그 의지를 반대하면…”

“어, 알아요. 나는 죽겠지. 아니면 지효경이 죽거나. 그게 내 그 빌어먹을 운명이라면서요, 씨발.”

“……”

“지효경이 없었으면 난 여기 있지도 않았어.”



그랬을 거야, 아마도. 이찬이 아득히 눈을 감았다. 영원히 모르는 채 자랐을 것이다. 단군의 아이니, 단군의 직계 후손이니.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랬다. 그땐 ‘생명’이 없었다. 없었으니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지킬 의무가 없었다. 이찬도 그랬을 것이다. 명절 때나 투덜거리고 말았겠지. 우리집은 제사를 왜 이렇게 성대하게 드리는지, 왜 개천절에도 제사를 드리는 건지, 나는 왜 하필 개천절에 태어났는지. 호족에 대해서도 영원히 모르고 살 수 있었다. 한민족의 흥망성쇠와 기운에 관여하는 산신령이니 뭐니, 그딴 거 내가 알게 뭔데. 아마 그랬을 것이다. 효경이 숨을 먹고 생명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효경아, 나를 고른 건 너야. 네가 나를 선택했어. 

네 반쪽, 네 그림자, 네 수호자. 네 심장, 네 운명으로.



“뭐, 어찌 되었든 간에.”



이찬이 금세 얼굴을 풀었다. 공기를 오래도록 팽팽히 당기지 않는 것은 이찬이 가진 좋은 점 중 하나였다. 둥그런 눈이 다시 호연을 향해 개구지게 웃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가 장난스레 툭 덧붙였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마요, 할배. 할배 아들은 성호 된 지 이제 고작 사흘이에요. 그 사이에 뭘 배우기는 했겠어? 지효경한테 참치캔 따는 법이나 배웠겠지.”

“……”

“나도 내 나름 생각이 있거든요.”



이건 모두 하늘의 뜻이다. 미룬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을 일이 아니다. 안다, 그쯤은. 이게 운명이고 순리라면, 효경아. 네가 그 숨을 먹은 것이 하늘의 뜻이었다면, 내가 너를 지켜야 하는 것도 하늘의 뜻이겠지. 그 망할 호랑이가 나비를 쫓듯 네게 끌려가는 것도,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너를 취하려고 하는 것도 모두 하늘의 뜻이고 정해진 순리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는 없다. 널 위해서, 아니.


사실은 나를 위해서.


해야 하는 거겠지. 생각을 삼키면서 이찬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내키지 않아도 내색은 끝내 하지 않았다.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찬을 눈으로 좇으며 호연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찌 벌써 일어나느냐. 물은 말에 이찬이 가볍게 대답했다. 약속.



“누구.”

“있어요.”

“효경이더냐.”

“……”

“이찬아, 네 벌써 이리 서두를 것까진…”

“생명은 만 스물, 그러니까 성년이 된 후에야 그 능력이 발동 된다면서요? 지효경 올해가 성년이에요. 아니, 됐지, 이미. 그리고 그 곁에는 또 딱 맞춰서 이제 갓 성호가 된, 아주 젊은 호랑이가 한 마리 있고. 그럼 조만간에 다른 것도 꼬이게 되어 있어요. 수컷들은 자기가 찍은 암컷한테 다른 냄새가 나면 그거 아주 머리 도는 거거든. 호랑이건 인간이건.”

“……”

“덫을 좀 칠 필요는 있어요. 그래야 ‘그쪽’에서 안달을 내고 덤벼들지.”

“덫이라니. 네 설마 그 자들을 찾은 게냐.”

“아뇨. 근데 감은 와요. 그것들이 절대로, 지효경을 저대로 두진 않을 것 같다는 그런 감.”



뭐, 촉이라고 봐도 좋고. 덧붙이며 이찬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틀리지는 않았겠지. 갈게요. 툭 말을 뱉으며 이찬은 훌쩍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이찬은 잠시 제 가슴께를 가만히 짚었다. 가슴에 낯선 고동이 느껴졌다. 천천히 잠들어 있던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달콤했던 꿈이 끝나는 것처럼.









* * *



졸려. 몽롱한 머리로 효경은 느릿느릿 생각했다. 기분 좋다. 나른하고 졸립다. 꿈같았다. 누군가 이름을 부르며 팔을 잡아 흔들었다. 효경은 그것조차 모두 꿈이라고 생각했다. 감겨 있던 긴 눈꼬리가 왈칵 구겨졌다. 아, 누구야.



“지효경, 지효경―”



한참 잘 자고 있는데. 효경이 비척비척 거리며 옆을 향해 돌아누웠다. 뺨에 눌린 질감이 어쩐지 가죽 같았다. 소판가? 몽롱한 의식 속에서 효경은 생각했다. 이런 데는 또 언제 앉았지… 다시 또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지효경― 부르며, 집요하게 흔들었다. 효경이 끝내 버티지 못하고 눈을 열었다. 홱 치켜뜨는 눈꼬리만큼이나 목소리는 별로 곱지 못했다. 아, 진짜!



“누가 자꾸 깨우는…”



그리고 볼륨을 줄인 것처럼 말소리가 우물우물 작아졌다. 그제야 눈앞에 있던 황금색 눈동자를 발견한 탓이었다. 녀석이, 호율이 울컥 눈을 구겼다. 등 뒤에 걸려있던 그림 속의 호랑이만큼이나 눈길이 사나웠다. 아무래도 상당히 오랫동안 자신을 깨우고 있었던 듯 했다.



“진짜 팔자도 좋다. 기다리라고 그랬지, 누가 퍼져서 자라고 그랬어요?”

“뭐야… 나 잤어? 얼마나? 몇 시야!?”



효경이 그제야 후다닥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주변을 살폈다. 화랑에는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고, 창 너머는 이미 붉었다. 말도 안돼. 효경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지금껏 계속 잤다니, 그것도 해가 저물도록. 기억도 안 난다.


어쩌다 잠든 거야?


효경은 분명 이 방에서 호율을 기다리고 있었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찬찬히 화랑을 둘러봤고, 보다보니 역시 회산은 회산이라 꽤 진지하게 감상했었다. 가장 안쪽 갤러리까지 들어왔었고, 거기에서 커다란 호랑이 그림을 한참동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졸렸었다. 그러다 분명히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고, 인사를 했고… 


이상했다. 기억이 안 나.


되짚어 봐도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눈길이 멍했다. 호율이 효경을 향해 입을 우물거리다, 이내 쯧 혀를 짧게 차고 말았다. 그리고는 아직도 소파에 늘어져 있던 효경의 겨드랑이 밑에 불쑥 손을 집어넣더니 쑥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순순히 일어난 건 순전히 잠이 덜 깬 탓이었다. 뭐, 뭐야? 좀 잠이 깨는지 효경이 코앞에 바싹 다가온 호율을 쳐다보았다. 호율은 곧바로 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제야 효경은 알아차렸다. 호율의 얼굴이 썩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없었어요.”

“너 얼굴 지금 장난 아니거든.”

“없었다니까요.”

“없기는. 일이 잘 안 풀렸어?”

“아, 없다고 하잖아요!”



노란 눈이 확 좁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목소리가 커졌다. 효경이 저도 모르게 주춤 했다. 그제야 호율은 아차 싶었다. 눈끝을 축 가라앉히며 호율은 우물거렸다. 미안해요.



“그냥… 내가 지금 기분이 좀 안 좋은가봐요.”

“왜.”

“……”

“나한테도 말 못 해? 안 좋은 일이야?”



호율이 대답 대신 입술 끝을 질근 씹었다. 짜증이 난다. 이러고 있는 제 자신한테도 짜증나고, 또 효경에게 속 시원하게 말해줄 수 없는 이 상황도 다 맘에 들지 않았다. 가장 짜증나는 건 그 인간이었다. 저를 두고 망할 호랑이 왕자 운운하던, 그 웃기지도 않는 남자 인간. 빌어먹을 단군의 아이.


단군의 아이는 무슨. 


생각에 호율은 다시 울컥 미간을 좁혔다. 단군의 아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호율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스승에게 종종 들었었다. 인간 세상에는 하늘과 인간의 뜻을 대변하는 대리자가 있으며, 그에게는 호족의 행위에 허락을 부여할 의무가 있다는 것. 그 모든 권리는 오로지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모든 호족의 권리보다도 상위에 위치한다. 그런데 그게, 하필 그 인간이라니. 해이찬이라니. 지효경의 입으로만 들었던 바로 그 이름이라니.

이찬은 가차 없었다. 딱 잘라서 거절하더니 이유를 묻는 자신에게 너는 아직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건 사실 어느 정도 예견했었다. 그래,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맹안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었고, 그게 무엇을 위한 일인지도 몰랐으니까. 회산에게 말했던 것처럼 모르면 배우면 된다. 부족한 부분은 노력하면 된다. 게다가 아무리 첫인상이 최악이었어도 해이찬은 지효경의 지인이었다. 그래서 호율은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막 방을 나서기 직전에 해이찬이 했던 말이 아직도 호율의 귀를 울렸다. 아니, 심장에 꽂혔었다. 비수처럼.


넌 잘 모르는 모양인데, 하고 해이찬은 첫 운을 뗐다. 뒤를 돌아봤을 때 눈이 마주쳤다. 해이찬이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말했다.



「지효경 심장에 있는 게 너냐? 나거든, 멍청아.」



그러니까 너는 아직 자격이 없어. 해이찬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 눈이 꼭 저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넌 안돼.


그 인간 진짜 싫다. 호율은 거듭 생각했다. 같이 비꼬지 않은 것도, 멱살을 잡지 않은 것도 오직 효경을 위해서였다. 노란 눈이 슬며시 효경을 향해 돌아갔다. 표정은 아직도 겁을 채 풀지 않았다. 그 얼굴에 호율은 어쩐지 기분이 복잡했다. 미안했고, 속이 상했다.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든 게 나인 것만 같아서.

미안해요. 호율이 거듭 고개를 숙였다. 효경이 눈을 잠깐 크게 열다, 이내 말았다. 동시에 긴 눈꼬리가 또 한 번 매섭게 일그러졌다. 이어지는 목소리까지 완벽히 평소의 지효경이었다. 이 고양이 새끼가.



“이제 종로 가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하는 것도 배워왔다? 어디에 대고 짜증이야!? 어오, 진짜. 기다려준 것도 감지덕지해야지, 어디에 대고 버럭버럭… 너, 이거 이번엔 그냥 못 넘어가거든?”



달래줬더니 또 금세 회복했다. 대단한 사람이다. 호율은 순수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짜증을 내도, 화를 내도 오히려 그게 더 마음이 놓였다. 픕 웃었더니 효경이 놓치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또, 또 웃고 있지, 또! 그래놓고는 긴 눈꼬리가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입술을 삐죽 모으면서 효경이 우물거렸다. 하여튼 웃는 건 예뻐서.



“아니, 그렇다고 딱히 니가, 어! 특별히 더! 잘 났다거나, 어! 그런 거 아니거든!? 너 오해하기만 해봐. 그냥! 어! 좀 생겼다 뿐이지, 그것 때문에 내가 딱히 봐주고 그러는 거 아니니까!”

“……”

“진짜 일부러 웃는 거야. 너 일부러 그러지? 화도 못 내게. 하여간 어디에서 못된 것만 배웠… 뭐야, 왜 또 웃어? 웃겨?”

“응, 웃겨요.”

“…야.”

“진짜.”



마른 손끝이 스르륵 효경의 뺨으로 다가왔다. 어? 효경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 채로 효경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주면서 호율이 스르르 웃었다. 어쭈? 어? 움츠린 어깨가 조금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꼭 굴 끝에 몰린 다람쥐 같아서 호율은 자꾸만 웃음이 났다. 아, 이 사람을 진짜, 어떡하지.



“귀여워.”

“…?!”

“귀엽다구요.”



효경의 얼굴이 왁 일그러졌다. 이게 돌았나. 등이라도 한 대 퍽 치려던 바로 그 찰나에 뭔가가 뺨에 닿았다. 쪽, 입술이 닿았다 재빠르게 떨어졌다. 갈색 눈이 쏟아질 듯 크게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주먹이 나갔다. 가슴을 퍽 쳐올리는데도 호율은 웃고 있었다. 좋다고, 이 등신이.



“어오, 진짜, 죽고 싶지, 어!?”

“왜, 재미있는데.”

“여기, 공공장소라고, 이 미친, 야옹이야.”

“아, 그럼 집에서는 해도 되나보다. 그쵸? 그럼 우리 빨리 집에… 잠깐요, 잠깐! 아, 지효경 손 진짜 맵다니까요! 아파요, 잠깐, 잠깐!”



맞아도 좋단다. 퍽퍽 맞으면서도 부슬부슬 웃고 있는 얼굴에 기가 찬 건 효경이었다. 이게 아주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정강이를 퍽 걷어찼더니 호율이 억 소리를 내면서 푹 주저앉았다. 웅크린 어깨가 한참동안 저 홀로 부들부들 떨었다. 웃느라고. 그러더니 앉은 채로 불쑥 효경의 손목을 잡았다. 야. 효경이 눈을 흘겼다. 하지만 호율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노란 눈이 둥그렇게 웃으며 효경을 올려다봤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요. 나 나름대로 선물도 받아왔는데.”

“? 선물?”



홱 손목을 빼내려던 효경의 눈끝이 스르륵 가라앉았다. 선물이라니? 효경이 연거푸 되물었다. 대답 대신 호율은 잡고 있던 효경의 손목에 꽉 힘을 실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적뒤적 거리면서 그제야 대답을 받았다. 방을 나올 때 회산이 저를 급하게 쫓아 나와 뭔가 이상한 것을 쥐어줬었다.



“뭔지는 몰라요. 근데 그 어른이 그러시더라구요. 되게 요긴하게 쓰일 거라고.”

“요긴하게 쓰인다는 게 뭐야… 핸드폰?”

“그건 아니고요. 무슨 돈을 대신해서 쓸 수 있는 거라고, 여기 넣었… 아, 이거다.”



찾던 것을 찾았는지 호율이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불쑥 끄집어냈다. 명함 크기만한 플라스틱 카드였다. 효경의 눈이 냅다 커졌다. 그냥 카드가 아니었다. 색부터 남달랐다. 새카맣고 짙은 까만 카드의 한 중간에는 웬 로마병정 같은 남자의 초상화가 박혀 있었다. 이런 카드를 전에 본 적이 있었다. TV에서, 그것도 재벌가 도련님들 얘기가 나오는 그런 드라마에서.

효경이 신음했다. 세상에.



“…블랙이잖아, 이거!?”



처음 봤다. 블랙이라니, 그것도 아멕스 블랙이라니. 호율이 눈을 둥그렇게 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블랙이 뭔데요? 좋은 거예요?”

“좋다니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어, 그러니까 네가 고기를 먹고 싶으면 정육점에 있는 거 다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거야.”

“헐, 대박. 진짜 좋은 거다.”



고기 얘길 했더니 단박에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이래서 맞춤식 교육이 필요하다. 생각을 삼키는동안에도 효경의 눈길은 내내 블랙 카드에 박혀 있었다. 어떡하지. 효경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고양이 밥값 때문에 엄마 카드를 전략적으로 긁어야만 했던 지난 석 달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카드 위에 홀로그램들이 둥실둥실 떠서 효경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디젤, 발망, 맥퀸… 역시 문이 열려 있으면 성자도 도둑이 되고, 견물생심이라더니 틀린 말 하나도 없다. 지금껏 한 번도 속물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 효경이 호율은 퍽 신기했다. 이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굉장한 건가보다. 지효경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생각하니 놀리고 싶어져서 호율이 카드를 들고 있던 손을 슥 뒤로 뺐다. 효경의 시선이 카드를 따라 슥 다가왔다. 그 앞에서 호율이 카드를 흔들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마치 장원급제하고 돌아온 어린 신랑 같은 얼굴이었다.



“거봐요, 내가 돈 벌어준다고 그랬잖아.”

“대체 왜 이런 카드가 너한테…”

“호족들은 돈이 많거든요. 아버지 말로는 우리가 다루는 지식이 인간들에게 요긴해서 그렇대요. 복잡한 건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니 카드 아니라서 갚아야 되고 그러는 거 아냐?”

“아닐 걸요? 내 꺼래요. 아버지가 맡겨둔 거라던데. 봐요, 여기.”



호율이 손끝으로 카드 한쪽을 쿡쿡 찍었다. Ho-yul이라는 글자를 본 것과 동시에 사흘 전까지 넌 고양이였는데 어떻게 카드를 쓰느냐는 소리가 쑥 들어갔다. 갈색 눈이 호율을 슥 쳐다보았다. 어쩐지 멍했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너 진짜… 왕자님이구나.”

“이제 알았어요?”



호율이 픕 웃었다. 그리고는 손끝으로 집고 있던 카드를 슥 흔들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저물녘, 햇살을 받은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이며 웃었다. 여전히 넋이 빠져 있던 효경을 바라보며 호율은 말했다.



“갖고 싶은 거 다 말해 봐요.”

“……”

“다 사줄게.”



효경이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이 호랑이 왕자가 귀여워서.












* * *



푸른 강물이 검은 용처럼 일렁거렸다. 


서산 너머로 해는 거의 기울었다. 오후 내도록 쏟아졌던 비는 이제 거의 그쳤지만 바람은 낮보다 더 강해졌다. 태풍이라도 오는 건가. 비탈을 오르면서 은호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왼편으로는 검은 강물이 용처럼 칭칭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제 몸을 꽁꽁 감고 있는 용의 형세라 하여 회룡포라 불렀다든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이후로는 이제 꽤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는 말을 해준 것은 지금 은호보다 서너 걸음 앞에 서 있는 남자였다. 

남자는 가벼운 바람막이 점퍼를 걸쳐 입고 등에는 카메라 가방을 짊어졌다. 올해로 다큐멘터리 감독 경력 15년이 되었다던 남자는 유난히 들떠 있었다. 감독은 걸어 올라오는 내내 이 프로젝트와 다큐멘터리 필름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류로만 만났던 클라이언트를 직접 모시고 취재 현장에 방문 중인 이 상황에 잔뜩 격양된 모양이었다.



“사실 이 집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저희가 보고서에 올려드렸던 그 어르신이 6.25 때 남편과 함께 직접 지은 집인데요, 전쟁 통에 원래 한 번 불탔었던 집을 다시 지었답니다. 그때 남편분이 곁을 떠나셨다고 하더군요. 여자 몸으로 혼자 아들 키우면서 고생도 참 많이 하셨더라구요. 안됐다고들 다들 그러죠. 이제 아들 내외도 잘 됐고, 손자도 보셨는데 고생만 하다 너무 일찍 돌아가셨으니…”



감독과 대화중인 것은 정민이었다. 그보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은호는 가만히 오랜 한옥을 살펴보았다. 오래도록 비어 있었다는 것치고 집은 꽤 깔끔했고, 마당에도 잡초 하나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이 집을 관리하는 것 같더라구요. 감독이 말했다. 생전에 동네 분들에게 큰 존경을 받던 어르신이었다며 감독은 부연했다.



“쓰시던 집기들도 거의 그대로 두었답니다. 아들내외의 뜻이었다고 하더라구요. 후에 나이 먹은 후에 내외가 이리 내려와 여생을 보내겠다고 팔지도 않았답니다. 아, 저쪽이 아들이 지내던 방입니다. 이쪽이 어르신이 쓰시던 방이고…”



마루에 걸터앉으며 감독이 왼편과 오른편을 번갈아 가리켰다. 정민이 감독의 손끝을 따라 실내를 둘러봤고, 은호가 마당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좋은 집이군요. 정민이 마루를 휘 둘러보며 말했다.



“집주인이 재주가 참 많으셨나봅니다.”

“바깥어른이 손재주가 좋았다고 하시더군요. 동네 아이들 썰매도 잘 만들어주고, 그림도 잘 그렸고… 글씨에도 재주가 많으셨답니다. 저기, 대들보에 저 상량문도 바깥어른이 쓰신 겁니다.”

“좋은 필적이네요.”

“예, 그래서 동네분들이 많이들 아깝다고 그러시죠. 혹은 그림쟁이로 살겠다고 집을 나가셨다는 얘기도 있고…”

“아이가 살았었나보군요.”

“네? 아, 네. 손자가 어릴 때 이 집에서 잠깐 살았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감독의 말에 정민은 말없이 자신이 바라보던 쪽으로 눈짓을 했다. 마른 벽에 뭔가가 그려져 있었다. 군데군데 색이 벗겨진 그림은 서툰 솜씨로 그린 듯 삐뚤빼뚤 엉성했다. 아이의 그림이었다. 갈색 크레파스로 그린 어설픈 모양새였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호랑이였다.

호랑이. 잠시 정민이 은호를 말없이 돌아봤다, 이내 시선을 걷었다. 한옥답게 천장은 참 높았다. 마루의 양면에 오밀조밀 놓여 있던 집기들을 은호는 천천히 훑어보았다. 감독의 말마따나 집기들은 대부분 남아 있었다. 감독이 계속 얘기를 이어갔다. 할머니와 함께 지냈었다던 손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아이도 이젠 많이 자랐을 텐데… 어릴 때 여기서 한참을 자랐답니다. 그러면서 어르신이 손자에게도 그 이야기를 자주 해준 모양이더군요. 여기에도 범이 살았다, 할머니는 범을 봤다, 범이 옛날에 아픈 사람을 낫게 해줬다… 뭐, 그런 동화말입니다.”

“손자는 지금 여기엔 안 삽니까?”

“그렇죠. 어르신 돌아가시고 부모가 바로 대구에 데려 갔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뭐라더라… 서울 무슨 대학교를 다닌다고 그랬는데.”

“벌써 성인이 된 모양이군요.”

“스무 살인가, 스물한 살인가… 아마 그럴 거예요. 저희도 지금 그 친구를 섭외해보려고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어릴 때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할머니를 대신해서 얘기해주는 거죠. 아무래도 비디오가 중요해서…”

“그 아이 이름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이름요? 아아, 이름이 아마… 잠시만요. 메모를 해놨는데…”



감독이 핸드폰 어플리케이션을 뒤적거리면서 대화는 잠시 중단됐다. 은호는 여전히 벽을 따라 마루를 둘러봤다. 뒤쪽으로는 뒤주, 오른쪽 벽에는 서랍장이 비죽 놓였다. 뒤주와 서랍장이 모두 같은 자개인 것으로 보아 아마 이 댁의 어른이 시집올 때 혼수로 해왔거나 아들 내외가 선물한 듯 했다. 서랍장의 속은 텅 비었다. 대신 맨 위에 액자가 하나 서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던 할머니와 손자의 모습이었다.

얼굴을 맞댄 채로 환히 웃는 얼굴을 은호는 잠시 뚫어봤다. 손자는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하얗고 작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함께 웃고 있던 제 할머니와 눈매가 꼭 닮았다. 유독 꼬리가 길게 잡힌 예쁘장한 눈이 카메라를 향해 함박 웃었다. 여우와 비슷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은호의 눈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저런 눈으로, 저렇게 새침하게 웃는 얼굴을 은호는 딱 한 사람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핸드폰에 파묻었던 눈을 불쑥 들었다. 스크롤을 주욱 내리면서 남자가 소리쳤다. 찾았습니다.



“맞을 겁니다. 그 손자 이름이…”

“……”

“지효경.”

“……”

“지효경일 거예요.”




검고 깊은 눈이 크게 일렁였다. 바람처럼, 강처럼, 어둠처럼.











(12편으로)








전편 후기에도 나와 있지만, 효경이는 빠른 년생입니다 (2월 20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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