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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아, 야옹아 ~10

1차 창작 BL










화랑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효경은 간단히 이렇게 소회했다. 대박.


“엄청 넓네…”


밖에선 작아 보였는데. 효경이 화랑 안쪽을 눈으로 죽 훑으며 우물거렸다. 여기는 북촌이었고, 좁다란 길을 따라 온통 고만고만한 한옥들뿐이었다. 회산의 화랑은 대로변에 있으니 찾기 쉬울 거라던 편의점 알바생의 말과 달리 효경은 호율과 함께 한참동안 같은 길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활짝 열린 대문 안쪽에 붙어 있던 포스터가 아니었다면 날이 저물어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포스터에는 현재 전시 중인 테마에 대한 안내와 함께 화랑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회산 지승명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호율이 먼저 성큼성큼 화랑 안으로 들어섰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꼭 30여분 전의 일이었다.

효경은 지금 혼자였다. 하지만 혼자라는 사실도 효경은 금세 잊어 버렸다. 화랑 곳곳에 걸려 있던 그림의 위용 덕분이었다.


“정말 호랑이 뿐이구나.”


평일인 데다 비가 온 덕분인지 화랑은 생각보다는 한산했다. 처음 안으로 들어설 땐 호율도 함께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위용을 자랑하던 호랑이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효경과 달리 호율은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들어서자마자 안내 데스크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잠깐 다녀오겠다면서 호율은 직원의 뒤를 따라 화랑에서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호율은 처음부터 이곳에 일이 있다고 했었다.

분명 회산을 만나러 갔겠지. 갤러리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효경은 생각했다. 팜플렛에는 이 화랑의 뒤쪽으로 회산의 작업실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사람 모습을 한 호랑이가 호랑이를 즐겨 그리는 화백을 찾아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어.”


화랑의 가장 깊은 곳에서 효경의 걸음이 오똑 멈췄다. 더 이상 이어지는 복도도 없는 걸로 보아 그 방이 이 화랑의 마지막 코스인 듯 했다. 방에 걸린 그림은 한 점 뿐이었다. 미술관을 자주 와본 것은 아니지만 이런 곳엔 대체적으로 가장 귀하고 비싼, 그야말로 걸작을 전시한다. 벽면에 걸린 그림은 가로의 폭만 10미터가 족히 넘어 보였다. 벽 하나를 독차지하고 있던 액자 속에도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거대한 호랑이는 화폭의 크기만큼 거대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라도 보는 순간 크기에 압도당할 법 했지만 효경이 오똑 굳은 것은 비단 그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앞에 서서 그림에 그려진 호랑이를 올려 보고 있었다. 남자였고,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남자의 차림새가 특이했다. 물색을 닮은 도포에 운동화. 허리께까지 찰랑이며 떨어지던 머리칼은 색이 햇님처럼 밝았다. 남자에겐 도무지 평범할 수 없는 그 모든 조합을 아우르는 힘이 있었다. 위화감이 없었다. 효경이 저도 모르게 한참동안 남자를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낀 남자가 효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효경은 저도 모르게 흡 숨을 삼켰다.

황금색. 남자의 눈동자는 황금색이었다.


“그림을 보러 온 모양이구나.”


남자가 효경을 향해 먼저 말을 붙였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초면에 반말을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건 순전히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목소리도, 효경을 부드럽게 바라보던 눈길도 어쩐지 전부 현실적이지 않았다. 잘 생겼다. 효경은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는 미인이었다. 예쁘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릴 법한 남자의 얼굴은 어림잡아도 20대 후반은 될까. 그럼에도 남자에겐 외형의 나이를 웃도는 기품이 있었다.

이상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효경은 생각했다. 낯설지 않았다. 내가 이런 사람을 알고 있었나. 되짚어 보다 효경은 오래지 않아 답을 찾아냈다. 야옹이.

그래, 맞아. 이 남자는 ‘야옹이’를 닮았다.


“좋은 그림이지. 이만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백이 이 세계에 과연 몇이나 있을꼬.”


남자를 따라 효경이 정면에 걸린 호랑이를 향해 눈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화폭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그림은 생생하고 역동적이었다. 당장에라도 바위 위로 뛰어 오를 것처럼 그림 속 호랑이는 전신에 기백이 넘쳐 흘렀다.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에는 효경과 남자 둘 뿐이었다. 하지만 효경은 주변에 있던 관광객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미처 깨닫지 못 했다. 어쩐지 몽롱했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산신이자 신의 대리자로 불렸단다. 혹은 신령이라고도 하였지. 그 기운이 영험하여 일제가 부러 몰살을 시켰다고 하더구나.”


아아. 효경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를 들었었다. 어디서 들었지. 생각이 잘 안 나. 머리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부얬다. 졸음이 몰려와서 효경은 멍하니 연신 느리게 고갯짓을 했다.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효경의 곁에 멈춰 섰다. 그 채로 남자는 효경의 옆에 선 채로 한참이나 그림을 감상했다. 효경은 이 상황이 잠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이만큼 다가오는데도 낯설다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너무 좋은 탓이라고, 아니면 남자의 분위기가 부드러운 탓이라고 효경은 멍하니 생각했다.

남자가 효경을 돌아봤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눈 끝을 부드럽게 접으며 웃었다. 눈을 올려보며 효경이 우물거렸다.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상해요.”


남자가 되물었다. 무엇이.


“제가 아는 사람을 닮았어요.”

“너도 내가 아는 사람을 많이 닮았구나.”

“……”

“참 예쁜 소녀였지.”


남자가 옅게 웃었다. 남자의 웃음소리는 마치 창에 걸어둔 풍경 소리처럼 청아했다. 울림이 좋아 효경은 따라 웃었다.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웠다. 졸음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자고 싶어. 꼬리가 긴 눈을 촘촘히 덮고 있던 속눈썹이 느릿느릿 끔벅거렸다. 남자가 효경을 향해 돌아섰다. 멍한 눈을 향해 남자는 웃었다. 남자의 맵시 좋은 손가락들이 효경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낯선 사람이 쓰다듬어 오는 손길을 효경은 미처 쳐낼 생각도 하지 못 했다.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남자가 말했다.


“네게선 참 좋은 향기가 나는구나.”

“……”

“조금 자두렴.”


효경이 흐 웃었다. 이내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리고 서서히 잠들었다. 늦은 봄날의 춘곤증처럼.





* * *


호율을 뒷문까지 안내해줬던 직원은 금세 자리를 떴다. 잠시 기다리시라며 직원은 꾸벅 허리를 숙였지만 호율은 그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 했다. 안채의 풍경 탓이었다. 화랑의 주인이 머물고 있다던 안채는 호율이 짐작했던 것보다도 더 넓었다. 조금 전까지 비가 오다 그친 참인지 너른 마당은 흠뻑 젖어 있었고, 비에 젖은 흙냄새가 허공중에 기분 좋게 떠돌았다. 바닥엔 인공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흙마당을 가로지르는 길에는 판판한 돌을 깔았고, 담벼락을 따라 대추나무와 밤나무가 정갈하게 심어져 있었다. 마당을 감싼 ㄱ자 모양의 한옥은 호율이 눈으로 대충 훑어도 허투루 지은 건물이 아니었다. 나무의 바랜 상태를 보니 지은 지는 꽤 되었다.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와는 최근에 다시 올린 듯 색이 깊지만 집의 골조를 이루는 나무 같은 것은 얼핏 보아도 100년은 훌쩍 넘었다. 오래된 나무인데도 결이 틀어지거나 벌어진 곳이 없었다. 마루로 오르는 섬돌, 각 방에 덧대어진 창문의 격자 하나 뒤틀어진 것이 없다. 진짜 작품이네. 호율이 솔직하게 감탄했다. 이 정도면 손재주 좋기로 소문난 호족들이 지은 천지의 가옥들에 견주어도 지지 않을 것이다. 창마다 새겨진 격자무늬를 따라 천천히 눈을 돌리다 호율은 불현 듯 집에 걸린 현판을 올려 보았다. 현판에는 이 집의 이름인 듯 보이는 한자 석 자가 단정히 박혀 있었다. 호예당(昊禮堂).


“하늘을 향해 예를 갖추다…”


우물거리던 호율이 일순 멈칫 했다. 기척을 느낀 탓이다. 마루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호율이 저도 모르게 바짝 몸을 굳혔다. 황금색 눈이 기척이 난 방향을 경계하듯 쳐다보았다. 마루 안쪽에서 누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이었다. 껍질을 얇게 벗겨 유약을 바른 지팡이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서 노인은 천천히 마루 끝으로 걸어 나왔다. 머리는 온통 백발이었고, 둥글게 굽은 등에는 이런 한여름에도 도톰한 숄을 걸치고 있었다. 뭐하는 할아버지지. 호율이 소리 없이 남자의 얼굴을 빤히 훑었다. 그러다 남자의 눈을 보았을 때 호율은 우뚝 굳었다. 싯푸르게 빛나는 두 눈은 눈이라기보다는 꼭 유리 구슬 같았다. 스스로 빛을 낼 줄 모르고 남의 빛을 반사시킬 줄만 아는 유리구슬처럼 노인의 눈엔 총기가 없었다. 그제야 호율은 효경이 했던 이야기에 대해서 떠올렸다. 시력을 잃고 마음의 눈으로 수많은 명작들을 그려냈다는 천재 화가, 회산 지승명.


“거기, 누구요.”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고 묘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경계심이 잔뜩 서려 있던 노란 눈이 잠시 혼란에 빠졌다. 생각하다 호율은 노인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이제 갓 성호가 된 젊은 호족이 오랜 세월을 살며 지혜를 쌓아온 인간 어른에게 예의를 갖추듯 차분하고 공손한 목소리였다.


“실례합니다. 회산 지승명 어르신을 뵈러 왔습니다.”

“회산이라 하면 이 미천한 늙은이를 이르는 말이외만.”

“예, 어르신을 뵈러 온 겁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르신.”


노인이, 회산이 잠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유리구슬 같은 눈이 호율 쪽을 정확히 돌아보았다. 눈썹이 좁아지는가 싶더니 회산은 이내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호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혹시 무슨 실수라도 했나? 허나 되묻기 전에 회산이 먼저 운을 뗐다. 주름이 앉은 손을 홰홰 저으며 회산은 허허롭게 웃었다.


“인사를 받을 것은 제가 아닐 텐데요. 귀한 손께서 어찌 저처럼 낮은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십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호연님의 하나뿐인 아드님이 아니십니까.”


호율의 눈빛이 날카롭게 좁아졌다. 정확하게 아버지의 이름이 불린 탓이었다. 눈도 보이지 않는 자가 어떻게 목소리만으로 내 정체를 정확히 짚어내는 거지. 게다가 호율은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게 된지 고작 사흘 밖에 되지 않았다. 설사 두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아버지조차 호율의 이 모습을 보지 못 했다. 헌데 이 자는 도대체 어떻게 아는 것인가.

생각하다 호율은 문득 눈을 들어 현판을 올려보았다. 호예당. 호율의 허리에는 저 현판의 맨 앞 글자와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하늘 호(昊)는 귀한 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쓰이는 한자도 아니다. 아버지는 도움이 필요하면 회산 지승명을 찾으라고 했고, 회산은 호랑이를 즐겨 그리며 호족의 별칭(昊)이 붙은 한옥집에 살고 있다. 이 우연히 단순히 셋이나 겹칠 수 있을까. 생각하며 호율은 다시 노인을, 회산을 돌아보았다. 저 자는 호족을 아는 자다. 그러나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곳이 백두산이 아니었기 때문에 호율은 그랬을 것이다.

호율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웃음을 지우며 호율은 다시 노인에게 물었다. 말투는 공손했다. 허나 전처럼 부드럽지는 않았다. 호율은 아직 감정을 감추는 일에는 서툴렀다.


“보이지도 않는 분이 어찌 그리 잘 아시는 겁니까.”

“진리를 들여다보는 일에 육체의 눈은 필요가 없지요.”

“어찌 저를 두고 그 이름을 함부로 꺼내십니까. 제가 아니면 어찌 하시려고.”

“허허, 그럴 리가요. 고귀한 기운이 이리도 넘쳐흐르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

“허면 다시 여쭙겠습니다. 당신은 호연님의 외아들 호율님이 아니십니까?”


회산이 온화하게 웃었다. 삶의 많은 것들을 내려놓은 듯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적의도,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얼굴에도 호율은 선뜻 경계를 풀지 못 했다. 20년 전에 아버지가 사라져버린 이후부터 호율은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사리사욕은 언제나 정을 앞선다. 여태 호율을 감싼 모든 것이 그랬다. 글자와 시를 가르쳤던 스승님이, 자신과 함께 굴 끝까지 나비를 잡으러 동행해주고는 했던 사촌형이 그랬던 것처럼.

예외는 오로지 당신뿐이었다. 자신을 길에서 데려와 석 달동안 마음을 다해 아껴 주었던 하얗고 예쁜 인간. 그는 호율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대가 없는 애정이었다. 사고를 칠 때마다 혼을 내면서도 제 머리를 긁어주며 캔을 따주었던 사람. 지금은 아마 바깥 화랑에서 이 고양이는 대체 언제 오냐고 짜증을 부리고 있겠지. 그 얼굴을 생각하자 호율은 어쩐지 웃음이 났다. 마음이 누그러진 것도 어쩌면 그 덕이었는지도 모른다.

회산이 재차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호율이 회산을 향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호율. 호족의 16대 족장 호연의 외아들, 호율입니다.”

“허면 당신이 이곳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얻고자 하는 것? 호율은 짐짓 당황했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호율은 그 다음 단계를 단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일단 찾아가라고 했으니 온 것뿐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이 사람에게 찾아가 도움을 구하라고 한 거지?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효경에겐 돈을 벌어다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단순히 금전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라고 아버지가 하필 이 자에게 자신을 보낸 건 아닐 것이다. 호율이 다시 현판을 뚫어 보았다. 호예. 하늘에 예를 다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저것과 꼭 같은 이름을 가진 건물을 천지에서 본 일이 있었다. 호예, 호예당… 뭐였었지.

그래, 역사관이었다. 호율은 오랜 예전에 스승과 함께 딱 한 번 그 건물에 올랐었다. 인간과 호족이 더불어 살아온 역사적 사료들을 전시하던 곳이었으며 한 쪽에는 작은 제단이 놓여 있었다. 그때 분명 스승님이 그 건물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을 꽤 길게 했던 것 같은데,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공부 좀 더 열심히 할걸. 호율이 인상을 팩 썼다. 그래도 그 제단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스승은 그 제단이 ‘허락’을 구하기 위한 제단이라고 했었다.

허락.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호율의 눈이 번쩍 열렸다. 그래, 허락. 호율이 회산을 올려보았다. 굳게 다문 입술을 열며 호율은 담담히 말했다.


“운명.”


눈처럼 하얀 눈썹이 옅게 일그러졌다. 호율이 거듭 덧붙였다.


“운명을 얻고 싶습니다.”

“운명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

“당신은 하늘을 열고 싶은 겁니까, 족장이 되고 싶은 겁니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

“그런 건 모릅니다, 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회산의 얼굴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의미를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너무 솔직했나. 뭐,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호율은 후회하지 않았다. 모르면 배우면 된다. 아버지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호율도 지금보다 많은 것들을 배웠을 것이다. 배울 수 없었고, 알 수 없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에서 가까스로 도망쳤는데도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조차도 호율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쨌건 나는 살았으니까.


“모르면 배우면 되는 것 아닙니까.”


회산이 유리구슬 같은 눈을 크게 뜨다,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호율의 눈이 옅게 일그러졌다. 놀리는 건가. 홀로 한참을 웃고난 후에야 회산은 고개를 홰홰 저으며 사과를 했다. 세월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얼굴이 온화하게 웃었다. 마치 옆집 할아버지와 같은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늙은이가 장난이 너무 짓궂었군요. 예. 배우면 되는 일이지요. 호연님이 아들을 참 잘 키우셨습니다, 허허…”

“……”

“이 늙은이는 호연님께 큰 빚을 지고 살고 있습니다. 허니 그 분의 아들이신 호율님에게도 적이 아니지요. 허니 그런 얼굴 하실 것 없습니다, 허허.”


인중을 당기고 있던 호율이 노란 눈을 동그랗게 열었다. 귀신이다. 눈도 안 보이면서 왜 저렇게 잘 알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회산은 그저 허허실실 웃었다. 그리고는 마루 한쪽으로 비켜서며 호율에게 손짓을 했다. 올라오십시오.


“호연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이 찾아오면 가장 먼저 도우라 한 일이 있었지요. 아마 호율님께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제게 가장 필요한 게 뭔가요?”

“맹안… 아니었습니까?”


마루로 올라서던 호율이 주춤 했다. 이 할아버지 진짜 귀신이다.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다 호율은 이내 다시 다물었다. 이런 노굴적인 얼굴은 이제 관두기로 했다. 또 들킬 것 같으니까. 회산이 웃으며 앞장을 섰다. 따라 오시지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호율은 회산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그러고 보니 이 할아버지도 누굴 닮았다. 누구였지. 걸으며 생각해보다 호율은 이내 관뒀다. 기분 탓이라고 호율은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복도는 생각보다도 더 깊었다. 비가 완전히 걷힌 모양인지 창호지를 바른 창마다 햇살이 잠잠히 마루 위로 쏟아졌다. 말없이 회산을 따라 걷다 호율은 문득 우뚝 멈춰섰다. 호율이 저도 모르게 왼편을 돌아봤다. 창호지를 두텁게 바른 방문은 닫혀 있었다. 이상하다. 호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냄새’가 났다. 아득한 냄새.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냄새 나요.”

“어떤.”

“그리운 냄새.”


하지만 아냐. 그럴 리가. 생각하며 호율은 부르르 고개를 털었다. 기분 탓이다. 회산의 얼굴처럼 지금 이 복도를 미미하게 떠도는 냄새도 전부 기분 탓일 게 분명했다. 만약 ‘그 사람’이 여기에 있다면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을 리가 없어. 분명 오래 전에 나를 찾아냈을 거야. 생각하며 호율은 다시 회산을 따라 걸었다. 발밑에 놓여있던 오랜 마루가 걸음을 따라 삐걱거렸다. 그 소리가 퍽 신이 나고 재미있어서 호율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복도는 이제 거의 끝이었다. 회산이 복도 끝에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그래도 자꾸만 조금 전의 그 냄새가 떠올랐다. 분명히 그 냄새였다. 그리운 냄새, 아득한 냄새, 지금은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의 냄새.

아버지.






* * *


복도를 걷던 걸음이 잠시 우뚝 멈췄다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문 안쪽에서 남자가, 호연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들을 꼭 닮은 황금색 눈동자가 난감한 듯 웃었다. 허허, 이것 참…


“회산이 함께 있어서 다행이로군.”


아니라면 호율은 벌써 이 문을 열어보았을 것이다. 제 아들은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궁금한 것은 곧 죽어도 확인해야하는 그 심성만큼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단단히 닫혀 있지만 잠금 하나 걸지 않은 문이다. 호율이 문을 열었다면 달아날 곳도 없이 진작 마주쳤을 것이다. 물론 회산에게 미리 말을 해두었으니 그리 두지는 않았을 테지만.

어려운 일이다. 생각하며 호연은 잠시 쓰게 웃었다. 만난다고 마음을 먹는다면야 만나지 못할 것도 없다. 세상 어떤 아비가 제 아들을 보고 싶지 않을까. 호연은 아직까지 호율의 자란 얼굴과 성호가 된 호랑이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 했다. 먼발치에서 훔쳐보듯 바라본 것이 전부였다.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허나 그리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아직은.


“때가 오질 않았으니.”


우물거리며 호연은 방 안쪽을 돌아보았다. 정가운데에 깔려 있던 색 고운 이불 위에 새하얀 소년이 쌕쌕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 있었다. 눈꼬리가 유난히 긴 소년의 얼굴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잠자코 바라보다 호연은 소리 없이 웃었다. 모로 누운 채로 소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참 깊게도 잠들었다. 저 상태라면 아마 두 시진이 지나도 깨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내가 네게 손을 댈 날이 이리 일찍 올 줄은 몰랐다마는.”

“……”

“미안하구나, 효경아. 헌데 그 아이가 너를 마주치면 곤란하다 하니 수가 있겠느냐.”


소리 없이 잠든 얼굴을 향해 호연은 쓰게 웃었다. 탓을 할 생각은 없지만 이건 모두 이 자리에 없는 이찬 때문이었다. 딱히 이찬의 부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가, 너는 내가 이 아이에게 도력을 쓴 것을 알면 아마 한참동안 또 화를 내겠지. 그래도 수가 없었다. 생각하며 호연은 다시 잠잠히 효경을 내려보았다. 유난히 꼬리가 긴 눈을 속눈썹이 촘촘히 덮고 있었다. 그 얼굴에 호연은 문득 웃음이 났다. 그리워진 탓이었다.


“많이 닮았구나.”


그 밤, 그 깊은 산중에서 마주쳤던 소녀가 꼭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깊숙한 시골에서 나고 자란 것치고 소녀의 피부는 참 보얬었다. 깊은 산 계곡 근처에 앉아 들고 온 망태를 저만치에 던져놓고 엉엉 울던 소녀를 호연은 아직도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여자가 야밤에 홀로 산중에 있기에는 험한 시절이었었다. 전쟁 중이었고, 밤에도 시골 산자락에는 포화의 불빛이 번쩍이던 때였다. 그 탓에 호연은 소녀에게 말을 걸었었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어 그랬고, 그럼에도 그곳에 홀로 앉아 울고 있던 사연이 궁금해 그랬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이었다. 그 해에 호연은 아버지가 되었었다.


“참으로 곱고 예뻤단다, 네 할머니는.”


우는 얼굴도, 토라지는 얼굴도 고왔었다. 산중에서 낯선 사내를 만나면 겁을 먹을 법도 한데 소녀는 외려 대담히 호연을 향해 눈을 부라렸었다. 당신은 누구냐며 따박따박 대거리를 하던 소녀는 퍽 당찬 구석이 있었다. 넘어지기라도 했던 모양인지 곱게 틀어올린 머리는 헝클어지고 치마도 흙투성이였건만 풀이 죽는 법도 없었다. 위험한 자가 아니라며 한참동안 어르고 달래다 어찌 그리 우느냐며 이유를 물었을 때에야 소녀는 비로소 왕 울음을 터뜨렸다. 호연은 그때 퍽 당황했었다. 인간이, 또 인간의 어린 소녀가 그리 우는 것을 처음 보는 탓이었다. 남편이 아프다며, 남편에게 줄 산삼을 캐러 왔다 길을 잃었노라며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던 어린 신부는 엉엉 울었다. 그래도 포기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었다. 그 눈을 호연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너와 꼭 닮았었다, 예쁜 아이야.


“네가 이리 된 것도 모두 하늘의 뜻이겠지.”


하필 네가 숨을 먹은 것도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또한 내가 호족에겐 두 알 밖에 남지 않은 귀한 환(丸)을 하필 네 할머니에게 주었던 것 역시 필경 하늘의 뜻이겠지.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은 호연 자신이었다. 족장 이전에 숨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호족, 치유하는 호랑이. 그것이 호연의 오랜 별칭이었다. 스스로 족장의 후계에 뜻이 없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의술에 집중했고, 이제는 그를 제외하고 누구도 ‘숨’을 만들 수 없다.

나는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길 바랐었지. 호연이 쓰게 웃었다. 하여 함부로 쓰이지 않기를 바랐다. 쉽게 만들지 않았고, 족장에 오른 후로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그것이 호연 자신을 여기까지 몰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천지에 볼모로 잡히고, 제 아들의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

허나 네가 ‘그것’을 먹었다면 뜻이 있을 것이다. 내가 네 할머니를 산 속에서 만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듯이, 네 할아버지의 목숨이 내 손에 붙어 있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듯이. 생각하며 호연은 느리게 웃었다.


“숨을 먹은 것이 너라서 참 다행이구나, 아이야.”


만일 네가 ‘생명’을 잉태하게 된다면 너는 누구보다 강해지겠지. 어쩌면 너는 그 어떤 호족과 인간들보다도 훨씬 더 특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아주 어쩌면 너는 이 모든 멍에를 종결시켜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반만년동안 천천히 일그러지며 벌어졌던 모든 틈이 너로 인해 끝날지도 모른다. 아이야, 네가 만약 누군가의 ‘운명’이라면.

그를 위해 나는 나서지 않는 것이다, 아이야. 네게도, 또 내 아들에게도. 그 모든 ‘끝’을 위하여.


“너는 참 강한 아이다.”


너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 우물거리고, 호연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채로 반듯하게 드러나 있던 효경의 이마 에 짧게 입을 맞췄다. 효경이 짧게 뒤척이다 이내 쌕쌕 숨을 흩으며 잠들었다. 부드럽게 웃으며 호연은 잠든 효경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우리 호율이, 잘 부탁한다.”


창 너머로 햇발이 말갛게 떨어졌다. 비 개인 날, 오후였다.






* * *


회산이 연 문 안쪽에는 또 문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쪽은 손님이 안쪽 방에 들기 전에 머무는 곁방인 모양이었다. 좌식 테이블에는 단정히 방석이 깔려 있었고, 한편에는 손님들을 위한 다기 세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방인가. 곁방을 주욱 둘러보면서 호율은 잠시 생각했다. 이렇게 깊이 지어진 방은 보통 그 고택의 주인이 머무는 거처다. 회산이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 할아버지는 시력을 잃은 대신 독심술이라도 터득한 모양이었다.


“제 거처는 이곳이 아닙니다. 이 안쪽은 그보다 더 귀한 분이 머무는 곳이지요. 댁이 따로 있어 가끔 들르기는 하십니다마는, 허허…”

“귀한 분이라니요.”

“곧 아시게 될 겁니다. 호족은 아니지만요.”


말이 애매했다. 호족도 아니고, 이만큼 나이 먹은 할아버지가 귀하다고 일컫는 분이라니. 호율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떤 인물인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아 호율은 이번에도 생각을 접어버렸다. 뭐, 어차피 들어가 보면 알게 되겠지. 하지만 회산은 곧바로 호율을 안쪽으로 안내하지 않았다. 유리구슬 같은 노인의 눈이 담담히 호율을 향해 말했다. 안쪽에 있을 귀한 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맹안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까?”


대뜸 물어온 말에 호율이 잠깐 눈을 크게 열다, 이내 접었다. 맹안, 그러고보니 맹안이 뭐였더라. 천천히 기억을 되짚을 때 가장 먼저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맹안은 그림자와도 같은 겁니다.

스승은 그렇게 말했다. 가장 어린 나이에 호족 12장로의 일원이 되었다던 그는 아버지의 오랜 벗이었고, 그 인연으로 어릴 적부터 자신을 가르쳤었다. 독특한 남자였다. 다른 호랑이들과 달리 하얀 털과 파란 눈동자를 가졌던 남자. 더러는 돌연변이라 했고, 더러는 저주받은 아이라 하면서도 대부분 그를 두려워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언제나 그를 벗으로서 아꼈고, 호율 역시 그를 존경하며 따랐었다. 스승을 생각하자 호율의 눈이 솔직하게 일그러졌다. 불쾌감과 분노를 느낀 탓이었다. 사촌 형을 대하는 기분과 똑같았다. 아마도 배신감 같은 것일 테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에게 맹안에 대해 가르쳤다. 생각하며 호율은 천천히 대답했다. 맹안은 일종의 위장이라고 스승은 말했었다.


“인간 사회에 섞여 살기 위해 호족이 스스로 자신의 눈색을 감추고 기운을 가리는 것. 그게 맹안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 역시 호연님의 아들다우시군요.”


껄껄 웃는 회산을 따라 호율이 쓰게 웃었다. 양심에 찔렸던 탓이었다. 공부보다 나비 잡으러 다니는 걸 훨씬 더 좋아했다는 걸 알면 이 할아버지도 뒷목 한 번 잡지 않을까. 족장 아들에 대해 회산이 가지고 있는 환상을 부수지 않기 위해 호율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회산이 다시 이어 물었다. 시작이 좋았던 덕인지 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허면 호율님께서는 그 맹안을 얻기 위해 어떤 절차를 따라야 하는지 알고 계시는지요.”

“아, 네. 호랑이, 하늘, 땅. 셋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다행히 호율은 두 번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호족은 모두 일정한 정도의 도력을 가지고 태어나며,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도력을 통해 능력을 사용한다. 도력은 하늘이 호족들에게 허락한 능력으로 새롭게 어떤 기술을 익힐 때마다 일정한 의식을 치러야했다. 맹안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스승이 가르쳐주었다.

스승은 호랑이, 하늘, 인간 셋의 허락이 있어야 맹안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호랑이는 호족 자신이다. 천지는 하늘의 뜻이며, 땅을 대표하는 것은 인간이다. 보통 천지에서는 이런 수순으로 의식을 진행했다. 허락을 구하고자 하는 호족이 밤중에 호랑이의 모습으로 천지에 들어가 제 털을 한 움큼 잘라낸다. 미리 나와 있던 인간의 대표가 그 털을 받아 천지의 맑은 물에 띄운다. 주로 호랑이를 창세신으로 섬긴다는 이족의 족장이 이 역할을 도맡고는 했다. 그가 띄운 머리칼이 천지 물속에 가라앉으면 허락을 얻은 것이고, 가라앉지 않으면 거부당한 것이다. 이는 호족의 오랜 전통 중 하나였다.

허나 어디까지나 천지에 있을 때의 얘기다. 이곳에는 하늘의 뜻을 대변해줄 천지가 없다. 대신 인간의 대표가 하늘의 뜻을 겸하게 된다. 하늘 뜻을 겸하고 인간의 대표가 될 수 있는 핏줄이 딱 하나 있었다. 하늘에서 태어나 스스로 이 땅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된 자들의 후손이지요. 스승은 그렇게 말했다. 하늘이며 땅인 유일한 존재였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호족은 어떤 것도 새롭게 얻을 수 없다.

아.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호율이 문 안쪽을 흘깃 돌아보았다. 회산은 저 안쪽에 ‘귀한 분’이 있다고 했었다. 회산이 천천히 웃었다. 이번에도 귀신같았다.


“예, 그 분이시지요. 흔히 ‘대리자’라고 부릅니다마는.”


대리자. 호율이 우물거리며 그 단어를 곱씹었다. 회산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에서는 천지보다 의식이 좀 더 간편하기는 합니다. 대리자의 허락만 받는다면 어떤 도술이건 새로이 사용할 수 있지요. 물론 맹안도 마찬가지입니다.”

“……”

“저는 호연님의 명을 받아 오래도록 그 핏줄을 곁에서 돌보고 있었습니다. 눈이 이렇게 되어 큰 도움을 준 적은 없습니다만, 허허…”


그럼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회산이 허허롭게 웃었다. 그제야 회산은 단단히 닫혀있던 안쪽의 문을 스르륵 열었다. 호율이 회산의 등 너머로 문 안쪽을 건너보았다. 병풍이 펼쳐진 안쪽 상석에 누군가 등을 대고 편히 앉아 있었다. 남자였다. 동시에 생각보다, 아주 많이 젊었다. 따지자면 제 또래, 혹은 지효경 또래 정도 될까. 밝게 색을 뺀 남자의 짧은 머리칼은 마치 귤 같았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끝이 쳐진 둥그런 눈을 구기며 남자가 문 쪽을 홱 올려보았다.

아, 진짜. 남자가 눈을 구기며 우물거렸다. 동시에 호율이 눈을 크게 열었다. 목소리 때문이었다.


“아, 어르신. 늦었잖아요. 한참 기다렸다구요.”


아씨, 나 약속도 있는데. 남자가 둥그런 눈을 구기며 연신 불퉁거렸다. 회산이 기가 찬 듯 허 웃었다. 방을 가로지르는가 싶더니 회산의 지팡이가 그대로 남자의 머리를 따악, 후려쳤다. 아, 아프잖아요! 하여튼 아직도 기운이 이렇게 정정하셔서는. 앓는 소리를 하는 남자를 보며 회산이 쯧쯧 혀를 찼던가. 호율은 그때에도 여전히 선 자리에 우뚝 굳어 있었다. 귀한 분이라더니 암만 봐도 망나니 손자를 대하는 것 같은 회산의 태도가 기이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는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를 호율은 분명히 들었다. 분명, 그러니까, 이 목소리는…

아씨, 세팅 다 하고 왔는데. 남자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에 회산이 또 한 번 끌끌 혀를 찼다. 아무리 봐도 한 해 두 해를 대한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욘석아, 너는 앞 못 보는 늙은이한테 바라는 것도 많다. 언제쯤이나 어른을 공경할꼬, 쯧쯧…”

“허, 어르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두 눈 멀쩡한 사람들보다 훨씬 나으면서 괜히 그러시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하여간 너는 그 주둥이가 재앙이다, 이놈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회산의 눈은 웃고 있었다. 남자가 둥그런 눈 끝을 개구지게 접었다. 넉살이 좋은 남자였다. 좋으시면서 괜히 그러시네. 농을 붙이다 남자가 문득 회산의 뒤편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문간에 서 있던 호율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슥 눈짓을 하며 남자는 회산에게 물었다. 둥그런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근데 웬 일로 손님을 달고 오셨대. 뭡니까, 저건?”

“어허, 저거라니. 이놈아, 저 놈이 어떤 분인 줄 알고!”

“알게 뭐람. 딱 봐도 나보다 어리겠고만. 야, 너. 뭐냐.”


남자가 툭 호율을 향해 물었다. 어허, 반말하면 안 된대도! 회산이 호통을 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호율은 답이 없었다. 답 대신 호율은 한참동안 남자를 빤히 뚫어보았다. 회산이 쩔쩔매며 호율을 돌아보았다. 그때에도 호율은 남자를 뚫어질 듯 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일단은 인사부터 나누시지요. 저 녀석 이름은…”

“알아요.”


둥그런 눈이 소리 없이 호율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뚫을 듯 노려보면서 호율은 말했다.


“…해이찬.”


남자가, 이찬이 호율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둥그런 눈매에서 천천히 표정이 사라졌다. 허. 이찬이 얕게 코웃음을 쳤다. 둥그런 눈매가 호율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아, 너냐? …지호율. 아니지.”

“……”

“…야옹이.”

“아마?”

“두 분 아는 사이셨습니까? 혹 전에 만난 적이…”

“없어요, 목소리만 들었지.”


대답을 하면서도 이찬의 시선은 줄곧 호율을 향해 있었다. 팽팽하게 노려 보면서 서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회산이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지팡이에 꾸욱 힘을 주었다. 공기 중에 떠돌던 긴장을 알아차린 탓일 테다. 허 신음을 흘리며 회산이 쓰게 웃었다.


“두 분 다 어찌 초면에 이러십니까. 호율님. 그리고 해이찬, 너도 이 녀석아.”

“……”

“호율님도 얼굴을 좀 푸시지요. 저 아이가 누군지 알고 이러십니까.”

“글쎄요,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요.”

“어, 됐네. 나도 마찬가지거든.”


회산이 가슴을 퍽퍽 쳤다. 어이고, 왜들 이러십니까. 지금 누구보다 입장이 곤란한 건 회산일 것이다. 백발노인의 주름이 좀 전보다 더욱 깊어졌다. 눈끝을 일그러뜨리며 회산이 말했다. 호율님.


“저 아이는 단군의 아이입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인간을 대리하는…”

“아니면 ‘숨’의 수호자라든가, 씨발.”


말을 가로채놓고 덧붙는 어휘가 그리 곱지 않았다. 그 얼굴이, 그 말투가 호율은 전부 다 맘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침에 저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었다. 이찬이 픽 코웃음을 쳤다. 비실비실 웃고 있는 입매와 달리 눈은 여전히 황금색 눈을 매섭게 노려 보았다. 회산이 이마를 훔쳤다. 아무래도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잘 됐네. 어차피 내 대답은 잘 알고 있을 거 아니냐고, 니가 ‘야옹이’면.”

“……”

“허락,”

“……”

“…해줄 리가 없잖아, 이 망할 호랑이 왕자야.”


회산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11편에서)









일주일만에 찾아뵙네요 허허허ㅠㅠ 이제 이찬이 정체가 명확하게 밝혀졌으니 애들 프로필을 대놓고 밝힐 수 있는 ㅠ0ㅠ 야옹이 주요 캐릭터 5인의 생일 및 별자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지효경 - 2월 20일 (탄생화:칼미아)     / 물고기자리 / A형

호율    - 6월 25일 (탄생화:나팔꽃)     / 게자리       / B형

해이찬 – 10월 3일 (탄생화:단풍나무) / 천칭자리   / O형

주은호 – 8월 15일 (탄생화:해바라기) / 사자자리   / AB형

한정민 – 10월 8일 (탄생화:파슬리)    / 천칭자리   / A형


+ 단군왕검의 성씨는 해씨였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정론은 아니고 추정이지만.. 해모수의 해도 단군의 직계성씨




▶ 피드백은 트위터 @trickse_r 또는 애스크 https://ask.fm/rukaruka

글을 씁니다. | 트위터 @ruka_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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